현재까지 기억하고 있는 베스트셀러극장이 무엇인지 묻는 설문을 한다면 이 화가 베스트 5에는 들지 않을까? 제목은 기억 못 한다 해도 주연으로 나온 조경환의 흰 눈동자를 기억하는 분은 많을 듯하다. 나 역시 새하얗던 그의 한쪽 눈과 벼랑에 매달려 소리 지르던 황신혜만 기억이 선명한데,
노단 역을 맡은 조경환. 유튜브 캡쳐 |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98회 "악마파"
: 1985.12.22일 방영. 김래성(김내성) 원작. 유인촌, 조경환, 황신혜, 김용건 출연.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봤다. 30여년만에 다시 본 악마파는 솔직히 허술한 부분이 많았지만 스토리가 주는 충격만큼은 여전했다. 예술에 미쳐 인간성을 상실해버린 두 남자와 그 사이에서 희생되는 한 여자. 그 광기 어린 핏빛 이야기.
주요 인물은 네 명이다. 장애인에 가난하지만 그림에서만큼은 천재를 가진 백추(유인촌), 건장한 신체와 부를 가졌지만 그림에서는 밀리는 노단(조경환),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루리(황신혜), 그리고 루리의 친오빠이자 세 사람을 연결시키는 역할의 김씨(김용건).
왼쪽부터 유인촌, 황신혜, 김용건. 유튜브 캡쳐 |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백추와 노단은 악마파 성향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물과 기름처럼 서로 대립한다. 두 사람 다 루리에게 첫눈에 반한다. 루리는 노단보다 백추를 마음에 들어 한다. 백추는 미술대전에서 상을 타며 천재성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축하하는 자리에서 루리에게 실망을 하고 사라져 버린다. 미전 수상작을 노단에게 남긴 채.
황신혜, 조경환. 유튜브 캡쳐 |
모욕당했다고 여긴 노단은 질투심에 불타오른다. 백추가 죽었다고 생각한 루리는 오빠가 시키는대로 노단과 결혼한다. 노단은 루리를 모델로 부리며 영감을 받으려 애쓴다. 하지만 결과물이 신통치 않자 정신 나간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이부자리에서 죽은 쥐를 발견한 루리가 숨넘어가게 비명을 지르자 캔버스를 들고 달려와 그림을 그리기 바쁘다. 점점 미쳐가는 남편에게 기겁한 루리가 오빠를 찾아와 하소연하지만 하나뿐인 가족인 오빠는 마치 남 얘기 듣듯 한다(원작을 안 읽어 봐서 소설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드라마에서 그의 태도는 참... 오빠 맞아요?).
루리가 갑자기 사라지고, 루리를 찾아 헤매던 노단은 변사체로 발견된다. 그의 곁에는 그림이 한 점 있었는데, 여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벼랑에 매달려 있다. 이 생생한 그림은 노단의 유작으로 발표되어 그가 살아있을 때는 결코 얻지 못했던 명성을 가져다준다. 바로 이 전시회에 돌연 백추가 나타나고, 그는 김씨를 자신의 거처에 초대한다. 음침한 창고 같은 그곳엔 파리떼가 웽웽거리고 악취가 풍긴다. 김씨가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여동생 루리.... 그녀는 죽어서도 아름답다.
백추가 그린 부시도. 유튜브 캡쳐 |
김씨 앞으로 그림 한 점과 백추의 유서가 배달되는데 거기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벼랑에 매달린 루리를 그린 것은 다름 아닌 백추였다. 극한의 공포에 질린 그녀를 본 순간 백추는 창작욕이 타올라 그림을 그려댄다. 그것도 모자라 떨어져 죽은 그녀에게서 또다시 영감을 받아 그림을 하나 더 그린다. 그것이 김씨에게 배달된 백추의 유작, 부시도(腐屍圖)이다. 아울러 백추가 김씨에게 마지막으로 한 부탁은 루리의 죽은 모습이 담긴 그 그림을 세상에 꼭 발표해달라는 것이었다.
줄거리를 써놓고 보니 정말 소름끼치는 내용이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자신의 욕구만 채우는 인간이라니... 자기 목숨 자기가 갖다 바치는 거면 누가 뭐라 할까. 하지만 여기에선 희생양 루리만 불쌍할 뿐이다. 그놈의 예술 따위가 뭐라고.
원작 작가 김내성에 대해 찾아보다가 악마파와 비슷한 일본 소설을 알게 되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썼다는 '지옥변'. 위키백과에 따르면 1930년대에 일본에서 공부한 김내성이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한다. 자기 딸이 타 죽어 가고 있는데 감상하듯 바라보는 아비라니. 안 풀리던 그림을 드디어 완성하고 자살........
한 장면을 몇백번 찍어놓고 결국 처음 찍은 컷을 영화에 썼다는 감독도 생각나고 강ㄱ씬을 찍겠다며 실제 ㄱ간을 시킨 감독놈도 생각나고 여자들에게 독약을 먹여서는 그 죽는 순간을 사진에 담은 놈도 생각나고..... 예술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하지만 사람 나고 예술 났지 예술 나고 사람 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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