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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7

제목을 모르겠는 KBS 특집 드라마 - 조수 간만의 차이 연구한 아이들

 
어렸을 때 본 특집극인데 제목도 주연 배우들 이름도 모르겠다. 오래전에 검색해봤을 때에는 분명 이 드라마 정보를 찾았었는데 지금 다시 찾아보니 나오는 게 없다. 그래도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작품이라 뭐라도 적어놓기로 한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어느 섬의 선생님과 초등학생 두 명이 매일 밀물 썰물 발생 시간을 관찰한다. 오랜 기간에 걸쳐 알아낸 사실을 무슨 과학 관련 대회에 낸다. 이들의 연구는 큰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가장 큰 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다.

아마도 초등학생 아니면 중학생 때 이 드라마를 보았는데, 주인공들이 나와 비슷한 나잇대이고 실제 있었던 이야기라 더 크게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어린아이 둘이 매일 밤인지 새벽인지 바다만 바라보고 있던 게 주로 생각난다. 비가 와도 날씨가 안 좋아도 예외는 없었다. 하루는 아이들이 늦잠을 잤던가 시간을 놓쳐서 선생님에게 크게 혼나기도 한다. 그렇게 고생을 거듭하다 가장 큰 상에서 이들이 불렸을 때 감동이 팍!

구글링을 해보니 고맙게도 관련 기사가 나온다. 1982년 전국과학전람회에서 작은 섬의 어린이들이 대통령상 수상. 초등학생이 이 대회에서 대상을 탄 것은 처음 있는 일. 

어느 기사는 몇 개월 동안 관측했다 하고 또 어느 기사는 1년에 걸쳐 했다 하고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최소 몇 달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바다에 매달려 있던 것은 분명한데, 요즘 같았으면 이런 연구가 과연 가능했을까 싶다. 생각해보니 동네 어른이 화를 내는 장면이 있었던 것 같고. 21세기에 이랬다간 아동 학대 얘기가 나오지 않았을지...😓 이 연구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린 학생들이 감당하기엔 정말 힘들었을 게 분명해서 한마디 붙여보았다. 나이를 먹으니 감상이 달라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어린이 두 명이 밀물 썰물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출처 강진일보

2024-02-11

나비 - MBC 베스트극장 (류수영 조윤희)

루게릭병
: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LS/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야구선수 루 게릭이 투병하면서 알려지게 된 병. 알 수 없는 이유로 운동신경 세포가 손상되면서 근육에 힘이 빠져 서서히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말기에는 음식물을 삼키고 숨을 쉬는 것도 어려워진다.


두 남녀가 침묵 속에 앉아있다
MBC 베스트극장 '나비' 조윤희, 류수영

MBC 베스트극장 제567화 나비


: 2004.02.06 방영. 드라마 '다모' 팬픽-김인숙 원작. 손은혜 극본. 이재규 연출. 류수영, 조윤희, 김정학, 유지인, 김갑수, 박준희, 서대한, 김소영 출연.

🦋 스포일러 심합니다 주의하세요 🦋

지원은 자신이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사이자 오빠인 현수는 지원에게 더욱 신경을 쓴다. 사실 두 사람은 친남매는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현수의 아빠가 여자아이를 집에 데려왔다. 그날부터 아이는 현수의 동생이 되었다.

집안에 먹구름이 낀 것은 지원이 누구의 자식인지 밝혀지면서부터다. 지원은 현수 아빠가 과거에 사랑했던 여자의 딸이었던 것. 남편 친구의 딸인 줄로만 알았던 현수 엄마는 지원을 집에서 내보낸다.



졸지에 버림받은 지원은 음악에 더욱 매달린다. 그리고 현수의 친구와 결혼까지 한다. 현수는 애인이 있었지만 마음을 주지 못하고 결혼을 계속 미룬다.

지원은 다시 혼자가 되고, 현수는 누구보다 지원을 챙겨주며 곁에 있으려 한다. 엄마에게서 현수를 놓아달라는 말을 들었던 지원은 현수를 밀어낸다. 하지만 현수는 더 이상 마음을 접지 못하고 꾹꾹 눌러왔던 진심을 토해낸다. 가족으로써가 아닌 지원을 사랑한다고......


MBC 드라마 '다모'는 시청률이 높지는 않았지만 숱한 폐인을 만들어낸 저주받은 걸작이다. 팬픽도 많이 나왔었는데 그 중 한 작품을 다모 연출자인 이재규 PD가 직접 단막극으로 만든 것이 '나비'이다. 결말만 보아도 지독하게 비극이다. 다모에 이어 그 파생작까지 비극으로 만들다니 너무했다 싶기도 하다.

사고난 차에서 피 묻은 주인공의 손
MBC 베스트극장 '나비' Sad Ending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의 러브스토리는 이제는 너무 흔해져서 별 감흥도 없지만, 유독 이 작품이 기억에 남은 건 엔딩이 충격적이어서다. 서로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으나 바로 얼마 뒤에 쾅. 현수가 지원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뻗지만 못 잡고 힘이 빠진다. 햐, 감독님 너무하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더 이상 없어 보이는데 손이라도 잡게 해주시지. 철저히 가혹해서 더 기억에 남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엔딩에 깔리는 노래가 너무 처연해서 찾아보니 이런 가사가 있다. But let them say whatever they will I love my love with a free good will. 그들이 뭐라 하든 나는 내 사랑을 계속할 거예요. 가수와 곡 제목은 Meav의 One I Love.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디에선가 힘든 사랑을 하고 있는 분들을 응원해본다(단, 불륜 빼고). 사랑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 인생 전부를 걸기도 하는 것일까? 모른다.... 모르겠어.......



* 동생 먹인다고 열심히 요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류수영의 셰프 기질이 엿보이는 듯하다.

류수영이 요리를 하고 있는 드라마 장면
MBC 베스트극장 '나비' 류수영의 요리 장면



* 조윤희가 주연한 영화 '동거, 동락'을 좋아했다. 개봉 당시 김동욱의 팬이어서 dvd까지 산 것인데, 조윤희의 연기가 좋았다. 지금은 본지 너무 오래 되어 스토리도 생각 안 날 지경이지만. 찾아보니 설정이 이 단막극과 통하는 점이 있다. 

* MBC 드라마 '환생-NEXT'에서 류수영이 몽골 장군 카사르로 나온 고려 편만 보았었는데, 고려 기생 자운영(박예진)과의 사랑 이야기가 너무 애절해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방영 당시 이 커플에 대한 인터넷 반응이 아주 뜨거웠었다. 


2023-12-05

가면의 꿈 - MBC 베스트극장 (남성훈 윤예희 한석규)


대기업 이사 탁명식(남성훈)은 가발과 콧수염으로 변장을 하고 거리를 돌아다닌다. 궁극적으로 가는 곳은 어느 포장마차. 젊은 여자 혜란(남나경)이 꾸리는 곳으로 명식은 그녀의 어린 동생들도 잘 챙겨주고 있다. 하루는 포장마차에서 혜란과 어떤 남자가 실랑이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출근길에 그 남자가 같은 회사 직원 양창수(한석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이 얼굴에 가면을 대 보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가면의 꿈' 남성훈

MBC 베스트극장 117회 가면의 꿈


: 1993.12.24 방영. 원작 이청준. 최순식 극본. 최용원 연출. 남성훈 윤예희 한석규 장인환
허윤정 한태일 정태섭 남나경 장송미 김경애 강인덕 정한헌 백승철 배인혜 최범호 최종환 
홍보경(아역) 홍상진(아역) 출연.


명식이 변장에 취미를 갖게 된 건 부부 동반 가면무도회에 다녀온 뒤부터 였다. 부인(윤예희)은 기묘한 취미에 빠진 남편이 마음에 걸리면서도 내버려둔다. 남편이 밤에 나갔다 온 날에는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침대도 뜨거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식은 포장마차를 찾아갔다가 혜란이 한강에 투신해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창수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한다. 고학생으로 해외개발팀 수석 연구원이 된 대단한 인물. 성실하고 유능한 직원. 혜란과 깊은 사이면서 태산그룹 외동딸과 사귀는 사이. 

창수는 경찰(강인덕)에게 자신은 결백하다며 포장마차에서 본 콧수염 남자가 수상하다고 말한다. 혜란이 자살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 명식은 사건 현장을 한참 파헤치다 증거가 될만한 것을 찾아낸다. 그리고 해고된 것을 항의하는 창수에게 일요일날 회사로 찾아오라고 한다.


일요일이 되고, 명식은 변장 도구를 챙겨서 회사로 간다. 부인은 친구(허윤정)와 함께 그의 뒤를 밟는다. 명식은 변장한 모습으로 창수를 맞이한다. 고학생으로 대기업에 들어가 사장 딸과 결혼한 그였기에 창수의 심리를 꿰뚫어 본다. 창수는 명식의 추리를 듣다가 범행을 인정하는 말을 내뱉는다. 그때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모습을 드러내고 창수가 끌려간다.

이 단막극의 압권은 바로 이 부분이다. 창수는 호락호락 물러가지 않고 엄청난 사실을 폭로한다. 명식이야말로 사장 딸과 결혼하기 위해 혜란의 언니를 버렸다는 것. 혜란의 언니는 명식의 자식을 낳았다는 것. 혜란이 죽은 언니를 대신해 조카를 동생으로 키우고 있었다는 것. 명식의 가면이 무참하게 벗겨지는 순간이다. 또한 그가 왜 새로운 가면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는지 바로 이해가 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명식은 창수의 가면을 벗겨냈지만 그것은 곧 명식의 가면이었다. 

🎭사🎭족🎭


* 처음엔 명식이 포장마차 주인에게 흑심을 품었나 했는데 실은 어렵게 사는 옛 애인의 가족들을 챙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동생들 중 한 명이 자기 자식인 것은 몰랐다. 마지막 장면에는 그 애들을 데려와 함께 사는 듯한 암시가 담겨 있다. 솔직히 부인이 보살&천사 같다는 생각만 든다.😓

* 드라마를 보고 나서 원작 소설 줄거리를 찾아보고 깜짝 놀랐다. 주인공의 성장 배경과 변장을 즐긴다는 설정 말고는 같은 게 없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직업은 판사이고 결말도 완전히 다르다. 소설을 모티브로 새로 지어낸 수준이다. 이 베스트극장을 보고 소설 읽은 척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명심하세요.

왼쪽부터 한석규 윤예희 허윤정
MBC 베스트극장 '가면의 꿈' 한석규/윤예희/허윤정

* 한석규 배우의 목소리와 발음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좋은 목소리에 발음이 또렷하고 강약이 분명해서 듣고 있으면 귀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 윤예희 배우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친구로 허윤정 배우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 남성훈-윤예희-한석규 세 배우의 조합이 신기하다. 


2023-12-03

골패 - KBS TV문학관 (백수련 반효정 조용원 남일우)


대학생 은영(조용원)의 집에 할머니(백수련)가 돌아온다. 할머니는 몇 년 동안 미국에 있는 큰딸(김진애) 집에서 지냈다. 원래는 한국의 장남(남일우) 집에서 살았었는데, 미국 영주권을 받아 가족을 초청해달라는 며느리(반효정)의 설득에 마지못해 간 것이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제사를 잘 챙기겠다고 약속해놓고는 돌아온 할머니[시어머니]에게는 자신의 종교 때문에 지낼 수 없었다며 딴소리를 한다. 

KBS TV문학관 골패에 나온 백수련과 조용원
KBS TV문학관 '골패' 백수련과 조용원

KBS TV문학관 제168화 골패


: 1985. 02.09 방영. 정건영 원작. 박병우 극본. 박진수 연출. 백수련, 반효정, 조용원, 남일우, 박혜숙, 김진애, 손창민, 곽경환, 나정옥, 박정웅, 이수연, 김영배, 김주호 출연.




한 달 간 와있기로 한 할머니는 은영의 방에서 지낸다. 할머니는 분신 같은 골패를 꺼내 짝을 맞추며 혼자 웃고 떠든다. 은영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귀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 마냥 기괴해 보인다. 은영은 할머니와 가까이 지내면서 할아버지가 얼마나 처참하게 돌아가셨는지 알게 된다.

할머니는 노인정 사람들을 불러다 잔치를 벌이며 미국 생활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자랑을 늘어놓는다. 노인들은 할머니가 주는 외국 과자와 초콜릿을 먹으며 들떠하지만 사실 이것들은 한국의 동묘시장에서 산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누군가가 '진짜 미제구만' 한 소리에 '그럼 가짜냐'며 몹시 발끈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노인들 욕을 마구 늘어놓다가 깡소주를 들이붓고는 돌연 며느리에게 소리친다. 미국에서 사람 대접은커녕 가정부로 부려 먹었다고. 며느리를 큰딸로 착각한 할머니는 그야말로 미친 사람처럼 울분을 쏟아낸다. 며느리는 은영에게 (아버지한테)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시킨다.



전보를 몇 번 씩 보내도 반응이 없었던 작은딸은 할머니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겨우 찾아온다. 작은딸은 오빠 부부와 엄마에게 감정이 많았다. 자신이 번 돈으로 오빠의 대학 학비까지 보태줬지만 오빠 부부는 할머니 재산을 다 가져버렸다. 할머니는 너희들이 원하면 안 가겠다며 지옥 같은 미국 생활에 대해 털어놓지만 할머니를 붙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영은 풀이 죽어있는 할머니에게 골패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골패를 주겠다고 한다. 은영은 할머니에게 골패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유산으로 물려받겠다고 한다.

출국하는 날, 할머니는 갖고 있던 보석 중 유일하게 진짜인 목걸이를 며느리에게 걸어준다. 출발 직전 며느리가 달려 나오지만 할머니를 붙잡는 게 아니라 할머니에게 이름표를 걸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할머니는 떠나고, 은영은 방을 둘러보며 할머니의 빈 자리를 느끼다가 책상 위에 골패가 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며칠 후, 전화 한 통이 걸려 오는데.......



🎲 🎲 🎲

아주 어렸을 때 보았으나 몇몇 장면들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특히 할머니를 박대하던 모습들. 마침 KBS 유튜브 채널에 올려져 있어서 다시 보니 작은 딸의 냉담함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며느리가 악역을 도맡고 있지만, 그렇다고 부인의 행동에 이렇다 할 행동도 취하지 않는 장남이 더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짧은 내용에 세대 갈등, 고부(시어머니와 며느리) 갈등, 종교 갈등, 가족 간의 갈등이 한데 뒤섞여 담겨 있다. 그뿐만 아니라 1980년대에 불었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허상 꼬집기까지. 만약 KBS UHD TV문학관 시리즈가 또 기획 된다면 이 작품도 꼭 넣어주시면 좋겠다.


손창민과 조용원이 길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KBS TV문학관 '골패' 손창민과 조용원

* 은영의 친구로 나오는 미남 배우는 손창민! 
* 할머니로 나온 백수련 배우는 며느리와 아들로 나온 반효정, 이일우 배우보다 젊다. 
* 장남 가족이 사는 저택은 TV문학관 젊은 느티나무에 나온 곳과 같아 보인다.
* 후반에 롱테이크(long take) 연출이 인상적이다.



2023-11-30

우리나라 배우의 호칭에 대해


추억의 한국 드라마 리뷰를 쓸 때는 출연 배우의 이름 뒤에 '배우'를 붙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이름을 알면 그것으로 부르면 되는데, 거의 기억이 나지 않으니 배우의 이름을 쓴 경우가 많았다. 또 연세가 많거나 돌아가신 분은 -님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계속 의식해서 쓰다 보니 피곤함이 느껴졌다. 배우 분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 이상, 등장인물로만 대할 땐 이름만 쓰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필요할 때만 '배우'를 붙일 것이다. 존칭이 필요할 땐 -님을 쓸 것이다. 글을 쓰다 보면 또 갈팡질팡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22.10.22일 예전 블로그에 썼던 글)

2023-11-04

사랑한다면 그녀처럼 - MBC 베스트극장 (남주희 손현주 임호)


29년을 살아오면서 연애 한번 못한 주인공 남희. 중병이 걸리자 지금까지 못해본 것들을 해보기로 결심한다. 제일 먼저 그녀가 한 일은 3개월 동안 애인 노릇 해줄 남자를 구한 것.


남희와 성준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사랑한다면 그녀처럼' 남주희 손현주


MBC 베스트극장 제288회 '사랑한다면 그녀처럼'


: 1997. 10.17 방영. 구선경 극본. 오경훈 연출. 남주희, 손현주, 임호, 강성연, 김기현, 이재훈, 이은철 등 출연.

방영 당시 재방송을 본 것 같은데 그마저도 중간부터 보았었다. (지금이야 웨이브에서 얼마든지 베스트극장을 볼 수 있지만) 다시 볼 방법이 없었던 시절엔 한번 보고 싶어지면 어찌나 안달이 나던지 유독 이 화가 그랬었다. 근 25년 만에 다시 보니 이럴 수가. 남희가 너무 불쌍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드라마 속 그녀는 누구보다 결단력 있고 강단 있는 캐릭터였다. 만약 다시 보지 않았다면 남희를 그저 바보 같고 가련한 여자로만 계속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진상들을 견디며 사는 은행원 남희(남주희)에게 그나마 낙이 있다면 짝사랑하는 남자 성준(손현주)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룸메이트의 애인이다. 속물 같은 친구는 양다리를 걸치고, 위암 선고를 받은 남희는 성준에게 마음이나 고백해보려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친구가 나타나 그를 다시 차지하고, 체념한 남희는 외모가 괜찮은 기훈(임호)을 고용해 가상 연애를 시작한다.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유흥을 즐기던 기훈은 처음엔 봉 잡았다고 좋아하지만 점점 남희의 순수함에 끌리게 된다. 그러던 중 남희는 진짜 솔로가 된 성준과 가까워지게 되는데.......

이 극에서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녹색'이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좋은 감정의 신호를 '그린 라이트(green light)'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이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2013년에 방영한 연애 상담 프로그램 '마녀사냥'의 영향이라고 한다(위키백과). 뭐 그렇다고 2013년 이전엔 녹색에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재 쓰이는 '그린라이트'와 상통하는 의미로 녹색이 극에 등장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남희와 기훈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사랑한다면 그녀처럼. 남주희 임호

남희가 성준에게 건네는 머그컵에 녹색이 들어있다. 성준이 좋아하는 카페의 이름은 그린 위치. 남희와 함께 쓰는 성준의 우산 색깔도 녹색이다. 남희에게 진심이 된 기훈이 입고 있는 재킷의 색깔도 녹색. 이쯤 되면 기훈의 스포츠카와 남희가 그를 처음 만난 날 입은 옷의 색깔이 붉은색인 게 우연은 아닌 것 같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중에서

남희의 연애 버킷 리스트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있었다. 그녀가 이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정작 사랑 따위에 질색하던 기훈이었다. 사랑을 포기한 남희가 스스로를 동정하듯 부르는 노래에서는 쓸쓸함이 짙게 묻어난다. 남희가 '잊지 못할 사람'을 생각하며 노래하는 동안 기훈은 '잊지 못할 이별'을 하고 성준은 '잊지 못할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 이 화에서 가장 압권이다.

리뷰를 쓰다 보니 남희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좋아한 것은 기훈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남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저 행복해졌기만을 바라 본다.


* 기존 리뷰 중에 여주인공이 죽는다는 식으로 써놓은 게 있었다. 드라마를 보긴 한 걸까?
*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줄 알고 하고싶은 거 다 해보다 인생이 좋게 풀리는 내용의 영화 '라스트 홀리데이'도 추천해본다.



한 잎의 여자 - MBC 베스트극장 (김현정 천정명 이영호)


베스트셀러극장이 베스트극장으로 바뀌어도 MBC 단막극의 명성은 계속 이어졌다. 베스트셀러극장은 반드시 '원작'이 있어야 했다는데 베스트극장에선 그 굴레를 벗은 것이다. 단막극은 신인들의 등용문이자 무대였다. MBC가 드라마 왕국으로 군림할 때 베스트극장도 성했던 게 우연만은 아닐 텐데. 들인 비용에 비해 시청률이 낮으니(요즘말로 가성비가 Hell) 현재 공중파 TV 채널에서는 특집극을 제외하고 단막극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옥희의 머리에 붙어있는 나뭇잎을 떼어주는 손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486회 한 잎의 여자


: 2002. 4.12 방영. 고동선 연출. 신경희 극본. 김연희 윤색. 김현정, 천정명, 나문희, 이영호, 양택조, 이세은 출연.

'한 잎의 여자'하면 오규원의 시가 먼저 떠오른다. 시를 읽어보면 왠지 연약하고 순수한 여자가 연상되는데 화자의 시선에선 슬픔이 가득 느껴진다. 이해가 안 가는 표현도 있지만 시인은 고인이 되신지 오래라 물어볼 수가 없다. 아무튼 같은 제목의 베스트극장 주인공 옥희는 시 속의 여자와 닮은 느낌이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 스포일러 심합니다. 주의하세요 ===

옥희는 스물두살이지만 정신 연령은 열 살 정도에 머물러 있다. 엄마가 기차선로에서 놀고 있던 옥희를 밀쳐내고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 트라우마로 옥희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다행히 좀 사는 동네 아주머니가 옥희를 거둬 키워줬지만 옥희가 좋아하는 그 집 아들 성재는 옥희의 몸만을 탐할 뿐이다.

어느 날 동네에 봉수가 나타난다. 가겟집 아들인데 성재와 다투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 길로 고향을 떠나 조폭 막내 노릇을 하다가 상대 조직의 보스를 찌르고 집으로 도망 온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옥희가 그의 상처에 관심을 가져준다. 계산할 줄 모르고 천진난만한 옥희가 자꾸 그의 눈에 들어와 밟힌다.


봉수가 옥희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

봉수는 자신을 만나러 온 조폭 동료가 옥희를 끌고 가자 필사적으로 따라가 구해낸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다. 옥희의 오빠는 성재에서 봉수로 바뀐다. 봉수는 옥희를 지켜주고만 싶다. 하지만 이들을 둘러싼 현실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옥희는 자신이 아이를 가진 것도 모른다. 봉수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약속된 돈을 받고 상대 조직의 보스를 다시 죽이려 하다가 쫓기게 된 봉수는 옥희가 보고 싶어 하는 바다로 함께 도망을 가려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봉수를 쓰러뜨린 것은......




사실 20년 전에 본 기억만으로 리뷰를 쓰려고 했었다(여기는 드라마 기억 저장소니까). 한데 쓸만한 이미지가 없어서 캡쳐도 할 겸 다시 보다가 내 기억과 다른 게 많아서 깜짝 놀랐다. 옥희를 키워준 아주머니로 나온 배우가 김영옥 님이 아니라 나문희 님이었다. 마지막 장면도 옥희가 오빠를 부르면서 어딘가를 헤매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작 극에서는 옥희가 기차 플랫폼에 쭈그려 앉아 숫자를 세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르게 기억할 수가 있을까?


죽어가는 봉수와 봉수를 기다리는 옥희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

가장 깼던(?) 부분은 죽었다고만 생각한 봉수가 부감으로 잡은 장면에서 움직인 것이다. 아, 여운 바사삭! 그래도 얻은 게 있다면, 지금까지 옥희가 너~어무 불쌍했었는데 봉수가 살았을 수도 있으니 이 비극적인 커플에게 희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시 보아서 뭔가가 사라졌지만 또 뭔가가 생겼다. 쌤쌤(same same). (아직 안 보신 분께는 강력 추천! MBC 베스트극장은 웨이브에서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옥희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

실제로도 영혼이 맑아보이는 김현정 배우의 근황을 찾아보니 화가로 활동 중이었다. WOW! 천정명 배우는 2022년 6월에 주짓수 최고 레벨인 블랙 벨트를 받았다고 한다. WOW! 두 배우가 극에서 얼마나 풋풋한지 젊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아역배우 박은빈-이재응-이세영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다음이미지

* 박은빈 배우가 옥희의 아역으로 나온다. 깜놀! 가게에서 과자 훔치는 아이가 있었는데 얼굴을 보니 아역 배우 시절 연기 잘하기로 이름났던 이재응이다. 이세영 배우와 함께 나온 KBS TV문학관 '소나기'에서 소년 역을 했었다.

* 나쁜 오빠 성재 역의 이영호 배우가 쓴 '한 잎의 여자' 촬영 일기가 있다.
https://www.imbc.com/broad/tv/drama/best/best_note/1315669_2629.html

* 고동선 PD의 인터뷰를 보니 자신이 연출한 단막극 중에서 '한 잎의 여자'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2023-11-03

나나, J를 만나다 - MBC 베스트극장 (신지수 정찬)


열일곱 살의 가출 소녀 나나와 서른 살의 부랑자 J(제이).

나나는 성인 행세를 하며 조건만남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J도 그렇게 만나게 되었지만, 그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과는 다르게 나나가 미성년자인 것을 알고는 거절한다. 영양실조로 쓰러진 나나를 차마 외면하지 못한 J는 보호자처럼 나나를 계속 챙겨주게 되고. 나나는 찔러보는 심정으로 임신 중절 수술비를 빌려달라고 하는데 J가 정말 돈을 마련해준다.


제이가 나나를 위로하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나나 J를 만나다.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526회 나나, J를 만나다


: 2003. 3. 14 방영. 신현창 연출. 박정화 극본. 정찬, 신지수, 김용희, 구혜령 출연.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나가 병원에 같이 가 달라는 부탁까지 하자 J는 내가 아이 아빠냐며 성질을 부린다. 그래놓고는 수술이 끝날 때까지 나나를 기다린 것도 모자라 자취방에 데려와 미역국을 끓여준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인간적인 대접에 나나는 펑펑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점점 마음을 열게 되는데......

당시 방영이 끝나자마자 MBC 베스트극장 시청자 게시판을 들여다보았는데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두 사람이 이루어지는 2탄을 꼭 만들어 달라고 요청이 줄을 이었다. 나도 같은 의견을 보탰었다.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이 재회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스토리를 지어보기도 했다. 그 어떤 화보다 여운이 정말 오래갔었다.

나나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가 뒤를 돌아본다
MBC 베스트극장 나나 J를 만나다. 웨이브 캡처

한데 근 20년 만에 다시 보니 예전과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기를 그렇게 바랐었는데, 지금은 두 사람의 차이가 더 부각되어 보인다고 할까? 13년이나 되는 나이 차이도 그렇고, 제법 사는 집 딸인 '찬주(나나)'와 새 삶을 살기 위해 정처 없이 떠난 '준(J)' 사이에 예상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괜히 상상이 된다. (다시 보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만약 소원대로 2탄이 나왔었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드라마로 남을 수 있었을까? 희망 없던 두 사람이 만나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쌍방 구원 서사물 중에서는 강력하게 추천할만한 작품인데 결말이 확실히 지어졌었다면 과연...?

- 추억의 드라마를 다시 보고 감상이 변하는 걸 느끼는 게 그다지 좋지가 않다. 생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옛 감상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이별의 왈츠 - MBC 베스트극장 (우희진 지진희)


야구를 그만두고 택시기사를 하고 있는 신기태. 어느 날 과거에 잠시 만났던 구민정을 승객으로 맞이하고 반가워한다. 하지만 구민정의 표정은 좋지가 않고. 급기야 그녀는 기태의 아이를 낳았다고 폭탄선언을 하는데...!

택시기사 지진희와 승객 우희진
MBC 베스트극장 이별의 왈츠. 지진희, 우희진. MBC 공식홈


MBC 베스트극장 542회 이별의 왈츠


: 2003. 07. 11 방영. 이정선 극본. 신현창 연출. 우희진, 지진희, 남상훈, 김철기, 임승대, 이영희 출연.



이 화도 정말 재밌게 봤었는데 제목을 기억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찾고 보니 제목이 왜 '이별의 왈츠'인지 모르겠다. 짧게 만났다가 흐지부지 관계가 끊겨버린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얘기니까 왈츠를 긍정적인 의미로 보면 되겠지만, 그럼에도 제목과 내용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만 든다. 이별의 왈츠라고 하면 왠지 헤어지는 일만 남은 연인이 떠오른다고 할까?

------ 스포일러 주의 ------

아무튼 20년 만에 다시 보고 나니 처음 봤을 때와는 감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또다시 느꼈다.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결혼하려는 구민정을 보니 이거 완전 사기 결혼이잖아~ 소리만 나온다. 아무리 아이를 친부한테 맡긴다 해도 직접 낳은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이걸 배우자 될 사람에게 밝히지도 않고 결혼이라니 Oh No~~~

그런 구민정의 심리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약 이런 일을 겪는다면? 이건 무조건 결별이다. 믿음 없는 사람과 어떻게 평생을 같이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구민정이 자기 자신만 아는 캐릭터는 아니지만(그랬다면 인생의 걸림돌이 될 아이를 어떻게든 안 낳았을 듯), 신기태가 워낙 바보같이 착한 캐릭터이다 보니 구민정이 더 이기적으로 보이긴 하다. 결국 구민정의 마음을 돌리게 만드는 것은 신기태의 사려 깊은 마음씨. 정혼자가 그녀의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키우겠다고 했음에도 구민정은 조건을 쫓던 자신을 벗어던지고 신기태에게로 간다. Happy Ending~

지진희,우희진,남상훈
MBC 베스트극장 이별의 왈츠. 지진희, 우희진, 남상훈. 웨이브 캡처

부드러운 미소가 매력인 지진희와 조각 같은 외모의 우희진, 너무나 귀여운 남상훈 아기까지.. 내용도 내용이지만 보는 눈이 즐거운 작품이었다. 아기는 이제 20대 청년이 되었겠구나. 세월 참.

* 비슷한 설정으로 SBS 드라마 '온니 유'가 있다. 조현재, 한채영이 아주 잘 어울렸었다.



그날의 분위기 - MBC 베스트극장 (김창숙 신윤정 김응석)


여성이 원나잇 스탠드로 임신을 하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아기의 생물학적인 아빠와 무조건 결혼? 낙태? 비혼모로 살아가기? 물론 생명은 소중하다. 하지만 여성의 인생도 소중하다.


연극부 후배 신윤정에게 연기를 지도하는 최종환
MBC 베스트극장 '그날의 분위기'

MBC 베스트극장 제153화 '그날의 분위기'


: 1994.09.30 방영. 조명주 극본. 강병문 연출. 김창숙, 신윤정, 전무송, 김응석, 최종환, 하미혜, 윤익희, 원지선, 김현석, 박희정, 강수영, 최범호, 최정미, 고용화, 유영재, 이은주 출연.



이럴 수가... 이 극의 주인공을 한혜진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신윤정! 하긴 1994년에 한혜진 배우는 미성년자였을 텐데. 각설하고, 오랜만에 신윤정 배우를 보니 몹시 반가웠다. 아울러 이 극이 이렇게 앞서간 내용인 것에 새삼 놀랐다.

===== 스포일러 주의 =====

주인공 지인(신윤정)은 대학교 연극부 활동에 열심이다. 그의 엄마 은숙(김창숙)은 비혼모를 돕는 봉사활동에 열심이다. 지인에게는 남자친구 석현(김응석)이 있는데 아직 깊은 사이는 아니다. 은숙은 비혼모들을 늘 보다 보니 딸이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신경이 많이 쓰인다.

연극부에서 락카페에 간 날 지인은 준호(최종환)와 끝까지 남게 된다. 준호는 연출을 담당하는 선배로 지인은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있는 상태였다. 지인은 새벽에야 집에 돌아오고, 은숙은 밤새 딸을 기다렸지만 그냥 넘어간다. 그리고 어느 날, 은숙은 청소를 하다가 임신테스트기를 발견하고는 딸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길로 당장 석현을 찾아가 결혼 얘기를 꺼내고. 날벼락을 맞은 석현은 배신감에 분노하지만 지인에게 얘기를 다 듣고는 조용히 이별을 고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원나잇 스탠드를 한 딸을 이해 못 하는 엄마는 준호와 결혼하라 하고 딸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며 자신의 일에 그만 개입하라고 일침 한다. 은숙이 생명 소중론자가 된 것은 사실 결혼 전에 낙태를 한 적이 있어서였다. 봉사활동도 그 속죄의 일환인데, 막상 딸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나니 이론과 현실의 차이가 크게 느껴져 혼란에 빠진다.

크게 갈등하던 두 사람은 결국 병원을 찾게 되고, 뜻하지 않게 신생아실 아기들을 보게 된 지인은 마음이 흔들린다. 서로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엄마와 딸. 과연 그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만일 내 문제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글쎄, 닥쳐보기 전에는 나도 모르겠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극이 만들어진지 30년이 흘렀지만 앞으로 30년, 아니 그 이상이 흘러도 이 문제는 정답이 없는 화두로 남을 것이다. 생명과 현실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여길지는 개인 각자마다 다를 테니까 말이다. 다만 법으로 이거 안 돼 저거 안 돼 정해버리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몸 상태에 대한 결정을 나 말고 누가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산부인과에서 엄마가 딸을 안아주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그날의 분위기'


* 비디오방, 락카페, 무기 같은 무선 전화기, 각이 살아있는 그랜져가 눈에 띈다.

* 지인의 가족이 간 레스토랑은 베스트극장 '쇼팽의 손'에도 나온 곳이다.

* 신윤정 배우 근황을 찾아보니 성형외과 의사와 결혼해서 잘 사신다고 한다.

*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다. 문채원 배우가 예쁘게 나온다.



2023-10-29

쇼팽의 손 - MBC 베스트극장 (김서라 나한일)


드라마 시작부터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숨가쁘게 흐른다. 밤길을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는 드뷔시의 달빛과 함께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하지만 곧 쇼팽의 프렐류드 24번(Chopin prelude op.28 no.24)으로 바뀌면서 누군가의 손이 여자의 목으로 향한다. 그리고.

김서라, 나한일
MBC 베스트극장 쇼팽의 손. 김서라, 나한일.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39화 쇼팽의 손


: 1992. 4. 12 방영. 이종학 원작. 김남 극본. 강병문 연출. 나한일, 김서라, 임문수, 박상규, 김경숙, 박주미, 박현심, 이도련, 최선균, 이효신, 김민석, 신동욱, 한석규, 김현숙, 윤진숙 출연.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경치 좋은 강가에서 유명 피아니스트가 사망한 채 발견된다. 장례식에 참석한 음악잡지 기자 수진(김서라)은 그곳에서 떠오르는 평론가 경태(나한일)와 처음 인사를 나눈다. 부와 명예, 외모까지 가진 그가 솔로라는 사실에 수진은 그에게 급 관심이 간다. 두 번째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수진은 취재를 갔다가 두 피해자 사이의 공통점을 알아챈다. 특정한 피아노 콩쿠르의 입상자라는 것. 놀랍게도 수진 역시 출전해 상을 탔던 대회였다. 그 와중에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나고 그 피해자 역시 콩쿠르 입상자인 게 밝혀지는데......

내용과는 별개로 쇼팽의 음악이 많이 나와서 보는 동안 귀가 즐거웠다. 드뷔시의 달빛이 생뚱맞게 느껴지긴 하지만 경태에게 의미가 큰 곡이니 패스. 손을 잃고 피아노를 잃고 인생을 잃은 자의 복수극. 군데군데 허술함을 빼면 소재와 스토리는 참 매력적이다. 다만 극 마지막에 나오는 명언은 안 넣었으면 좋았을 것을. 누구는 누군가의 장난으로 모든 것을 잃었는데, 이 명언은 왜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해내지 못했냐고 탓하는 것 같아서다. 쇼팽이 손을 다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훌륭한 작곡가가 되었다지만, 모두가 그렇게 쇼팽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찰스 램의 명언
MBC 베스트극장 쇼팽의 손

* 한석규가 피해자의 가족으로 잠시 나오는데 목소리와 발음이 너무 좋아서 단박에 튄다.

* 최선아 배우와 많이 닮아보이는 배우가 나온다. 성함이 김현숙 맞을까? 1991년 MBC 20기 공채 탤런트라고 하시니 맞을 수도.




- 쇼팽하면 쇼팽 콩쿠르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우승한 조성진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2016년 Beirut Chants Festival에서 연주한 Chopin prelude op.28 no.24 영상은 강력 추천! (03:15부터)



조성진이 연주하는 드뷔시의 달빛





따뜻한 겨울 - MBC 베스트극장 (박순애 최민수 신진희)


가진 것은 없지만 오손도손 살고 있던 부부에게 비극이 들이닥친다. 희망이 없는 부부는 어린 딸을 데리고 죽음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박순애와 최민수
MBC 베스트극장 따뜻한 겨울. 박순애, 최민수. 영상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19화 '따뜻한 겨울'


: 1991.11.17 방영. 신선희 극본. 이은규 연출. 박순애, 최민수, 신진희(아역), 이도련, 김정, 홍성선, 서영애, 이상철, 정인석, 유준석 출연.



베스트셀러극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 있었다. 한 가족이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을 빌려 신기한 듯 구경한다. 엄마는 애들을 재우고 아빠는 연탄인지 뭔지로 연기를 피워놓고 가족 옆에 눕는다. 그러다 누가 들어왔던가 아니면 부부의 생각이 바뀌었던가 해서 다급히 환기를 시키는데.......

베스트극장 리스트에서 '따뜻한 겨울'을 발견하고 옳다구나! 하고 좋아했더니 아니었다. 비싼 호텔방을 빌려 하룻밤 자는 것만 똑같았다. 설마 기억이 왜곡되었나? 아닌데. 가족이 호텔에서 쫓겨나는 장면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이건 또 무슨 단막극이란 말인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병희(박순애)와 이에 절망해버린 민수(최민수)는 병희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바닷가를 찾아가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정리하기로 한다. 얼마 없는 전 재산을 다 써가며 가족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병희의 갈등도 깊어진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 딸 효영이(신진희)를 죽게 할 순 없다는 마음속 외침이 점점 커지고. 병희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도 없는 민수는 결국 마음을 돌린 병희에게 몹시 화를 낸다. 그런데 하필 이때 찾아온 불청객....... 드라마지만 이거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




이 화를 보는데 2022년 여름에 있었던 어떤 사건이 겹쳐졌다. 부부와 어린 딸이라는 가족 구성도 같고 자동차로 바다를 향해 이동하는 것도 같아서, 이미 이곳을 떠나버린 세 사람이 자꾸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젊은 부부가 무슨 사정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경제적인 문제로 짐작할 뿐),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반응과 부모에게 죽임 당한 아이가 불쌍하다는 반응이 팽팽히 맞섰다. 다른 거 둘째 치고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을 아이는 대체 무슨 죄일까? 이런 경우엔 누가 뭐래도 무조건 아이의 편이 되어주련다.

신이 야속한 건 사람을 무슨 기준으로 데려가는지 알 수가 없어서다. 최소한 어린이나 어린 자녀를 키우는 사람은 좀 천천히 데려가시지. 어린 자녀 두고 뇌출혈로 갑자기 가버린 지인이 불현듯 떠오른다.


아빠와 딸이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따뜻한 겨울. 영상 캡처


* 극 중 인물에게 '그 얼굴로 배우를 하지~' 엉뚱한 소리를 할 때가 있다. 역할에 비해 배우의 외모가 넘친다 싶으면 그렇다. 이 화의 최민수를 보며 뻘소리를...

* 박순애 하면 인현왕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MBC 조선왕조 500년 '인현왕후'에서 자애로운 인현왕후로 나왔는데 장희빈 역의 전인화와 연기 대결이 볼만했다. 은퇴하신 뒤로 우리나라 주식 부자 명단에서 가끔 뵈었다.




지난 겨울 우리는 - MBC 베스트극장 (도지원 감우성)


아주 우연히 만난 두 사람.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다. 서로를 운명이라 여기며 결혼을 약속하지만 이내 먹구름이 낀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의 부모는 철천지 원수나 다름없는 사이였던 것.

감우성이 도지원을 등 뒤에서 껴안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지난 겨울 우리는' 감우성 도지원.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79회 '지난 겨울 우리는'


: 1993. 2. 19 방영. 이덕자 원작. 김사현 연출. 박순영 극본. 도지원, 감우성, 박성미, 권성덕, 정영숙, 한상미, 강이은, 차광수, 김정현 출연.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아주 어린 시절에 남자가 저지른 죄.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번 지은 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서로의 기억 속에도 없는 일이기에 무시해보려 했지만,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두 사람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필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한 운명의 가혹함이란.

이 화가 유독 기억에 남았던 건 바로 백허그(back hug) 장면 때문이다. 물건을 돌려주러 온 여자가 자리를 뜨려 하자 뒤에서 붙잡듯 확 껴안는 남자.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이별한 상태에서 서로 감정을 누르고 있다가 터지는 장면이라 느낌이 아주 강렬했다. 덕분에 백허그에 대한 환상까지 생겼었는데.... 근 30년 만에 다시 봐도 멋지다.


도지원과 감우성
MBC 베스트극장 '지난 겨울 우리는' 도지원 감우성. 웨이브 캡처

캡처를 하다 보니 연출자가 장면 장면 신경을 많이 쓴 느낌이다. 별 장면이 아니었는데도 멈춰놓고 보면 스틸 사진처럼 근사하다. 다른 백허그 장면도 있는데 그림이 예쁘다(역시 백허그에 대한 환상을 심어줄만 했다). 원래는 죽음으로 완성되는 사랑을 그리려 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 두 사람이 바다에서 벌인 일은 실제인지 상상인지 알 수가 없다.

이 화는 백허그 얘기만 할까 했으나, 다시보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안 보고 넘어가기가 힘들다. 실로 오랜만에 다시 보고 나니 눈에 거슬리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잊고 있었던 추억을 되찾은 기분이 크다. 아울러 백허그에 대한 환상은 계속된다. 쭈욱~




* 여주인공의 오빠로 김정현이 나오는데 드라마 타이틀에는 이름이 없다. 단역이라 하기엔 대사도 몇 마디 있건만. MTM에서 보조 출연자로 나온 건가? MBC '아들과 딸'에서도 김정현 비슷하게 생긴 단역을 보았으나 사실 확인은 못 해보았다.

김정현이 어린아이와 놀아주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지난 겨울 우리는' 김정현. 웨이브 캡처

* 도지원은 SBS '토지'에서 홍씨 부인으로 나왔다. 연기를 못한 건 아니지만 이미지가 너무너무 안 어울렸다. 남편 조준구와 더불어 뼛속까지 악랄한 인물인데 아무리 봐도 그렇게 안 보이니.

* 최진실 최수종 주연의 MBC '질투'가 대박 나고 그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매혹'인데, 당시 신인급인 감우성이 최진실의 상대 역을 맡아 화제가 됐었다. 2회였나 감우성이 최진실에게 수위 높은 대사를 던지고 끝이 나서 충격 받았었는데 그게 뭐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자고 갈래?' 였었나?




2023-10-28

토끼의 아리아 - MBC 베스트극장 (김승욱 박그리나)


술김에 학생에게 키스한 대학 강사. 술이 깨니 정신이 번쩍 든다.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는 학생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데.......


여자가 남자를 뒤로 잡아 끌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토끼의 아리아. 출처 공식홈

MBC 베스트극장 제635화 토끼의 아리아


: 2006.04.22 방영. 곽재식 원작. 진헌수 극본. 손형석 연출. 김승욱, 박그리나, 김하균, 김미연, 이정현, 유형관, 장미화 등 출연.



이 화의 원작은 곽재식의 단편소설 [판소리 수궁가 중에서, 토끼의 아리아 "맥주의 마음"]. 곽재식은 카이스트 박사이자 기발한 소설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MBC 심야괴담회를 비롯해서 방송 패널로도 많이 나왔다. 더욱이 본업도 따로 있으면서 줄기차게 작품을 발표하는 그 필력이 놀랍고 부러울 뿐이다.

원작 소설은 읽지 않았고 이 화만 보고 리뷰를 쓰는 건데, MBC 공식홈에 밝혀놓은 기획 의도를 읽어보니 솔직히 황당하다. 극에서는 성추행범으로 학교에 소문나서 밥줄 끊길까봐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지어내 상황을 모면하는 못난이 밖에는 없던데. 간을 노리는 자라한테 속아 용궁에 갔다가 꾀를 발휘해 살아 돌아온 토끼 마냥, 주변 사물들로 그럴듯한 얘기를 지어내 경찰을 속이는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주인공 마냥 그리려 한 것은 알겠으나 이야기를 지어내는 의도가 워낙 지질하다 보니 그 기발함이 묻혀 버린다.

게다가 순순히 속아 넘어가는 여학생이 너무 바보 같이 그려져 더 반감이 드는 것도 있다. 미래의 교수 부인 운운하며 밀어붙이라는 동네 언니 말대로 짐까지 싸들고 동거할 각오로 오다니 이뭐병. 방영 당시에 봤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2020년대에 본 이 화는........ 한숨만 나온다.




 * 곽재식이 어떤 작품을 쓰는지 알고 싶다면 그의 단편소설 중 '초공간 도약 항법의 개발'부터 읽어보시기 바란다("지상 최대의 내기"라는 단편집에 실려있음). 갑질을 이렇게 실감 나게, 독특하게, 기발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또 있을까? 이 작품 읽고 그가 정말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신 - MBC 베스트극장 (이민정 이동규)

 
사건을 수사하면서 미스터리한 용의자에게 점점 빠져드는 형사. 심은하, 한석규 주연의 영화 '텔 미 썸딩'이 퍼뜩 떠오른다. 시선을 잡아 끄는 외모에 자꾸만 궁금증을 갖게 만드는 비밀의 여인. 이 화에서 이민정이 그런 역할이었다. 형사마저 본분을 잊고 빠져들게 만드는 팜므파탈 타투이스트. 결국 형사(이동규)에게도 문신이 새겨지고. 


배우 이민정과 이동규


MBC 베스트극장 제620회 '문신'

: 2005.11.26 방영. 이명숙 극본. 김상래 연출. 이동규, 이민정, 연운경, 박충선, 이대연, 장태성 등 출연.

이 화는 다시 보지 않고 기억에만 의존해서 리뷰를 써본다. '문신'은 재밌게 본 화였다. 뭐 그러니 머릿속에 남았겠지만. 여기에서 이민정이란 배우를 처음 보았다. 저 낯선 배우가 누구일까 막 궁금했었다. 이동규는 맡은 배역을 위해 실제로 호스트바에서 일을 해보았다는 인터뷰가 인상 깊었던 배우였다. 보고 나선 이민정 찍(그녀는 훗날 KBS '꽃보다 남자'에서 이민호의 정혼자 역으로 큰 인기를 얻는다).

리뷰를 써놓고 보니 내용이 없다. 
이럴 바엔 다시 보고 쓸 걸...😓


2023-10-23

악마파 - MBC 베스트셀러극장 (유인촌 조경환 황신혜)


현재까지 기억하고 있는 베스트셀러극장이 무엇인지 묻는 설문을 한다면 이 화가 베스트 5에는 들지 않을까? 제목은 기억 못 한다 해도 주연으로 나온 조경환의 흰 눈동자를 기억하는 분은 많을 듯하다. 나 역시 새하얗던 그의 한쪽 눈과 벼랑에 매달려 소리 지르던 황신혜만 기억이 선명한데, 유튜브에 설마 하고 찾아보니 있다! 유레카! (현재는 없음)


악마파 화가로 나온 조경환
노단 역을 맡은 조경환. 유튜브 캡쳐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98회 "악마파"


: 1985.12.22일 방영. 김래성(김내성) 원작. 유인촌, 조경환, 황신혜, 김용건 출연.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봤다. 30여년만에 다시 본 악마파는 솔직히 허술한 부분이 많았지만 스토리가 주는 충격만큼은 여전했다. 예술에 미쳐 인간성을 상실해버린 두 남자와 그 사이에서 희생되는 한 여자. 그 광기 어린 핏빛 이야기.

주요 인물은 네 명이다. 장애인에 가난하지만 그림에서만큼은 천재를 가진 백추(유인촌), 건장한 신체와 부를 가졌지만 그림에서는 밀리는 노단(조경환),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루리(황신혜), 그리고 루리의 친오빠이자 세 사람을 연결시키는 역할의 김씨(김용건).


유인촌 황신혜 김용건
왼쪽부터 유인촌, 황신혜, 김용건. 유튜브 캡쳐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백추와 노단은 악마파 성향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물과 기름처럼 서로 대립한다. 두 사람 다 루리에게 첫눈에 반한다. 루리는 노단보다 백추를 마음에 들어 한다. 백추는 미술대전에서 상을 타며 천재성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축하하는 자리에서 루리에게 실망을 하고 사라져 버린다. 미전 수상작을 노단에게 남긴 채.


결혼하는 노단과 루리. 울부짖는 루리
황신혜, 조경환. 유튜브 캡쳐

모욕당했다고 여긴 노단은 질투심에 불타오른다. 백추가 죽었다고 생각한 루리는 오빠가 시키는대로 노단과 결혼한다. 노단은 루리를 모델로 부리며 영감을 받으려 애쓴다. 하지만 결과물이 신통치 않자 정신 나간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이부자리에서 죽은 쥐를 발견한 루리가 숨넘어가게 비명을 지르자 캔버스를 들고 달려와 그림을 그리기 바쁘다. 점점 미쳐가는 남편에게 기겁한 루리가 오빠를 찾아와 하소연하지만 하나뿐인 가족인 오빠는 마치 남 얘기 듣듯 한다(원작을 안 읽어 봐서 소설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드라마에서 그의 태도는 참... 오빠 맞아요?).




루리가 갑자기 사라지고, 루리를 찾아 헤매던 노단은 변사체로 발견된다. 그의 곁에는 그림이 한 점 있었는데, 여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벼랑에 매달려 있다. 이 생생한 그림은 노단의 유작으로 발표되어 그가 살아있을 때는 결코 얻지 못했던 명성을 가져다준다. 바로 이 전시회에 돌연 백추가 나타나고, 그는 김씨를 자신의 거처에 초대한다. 음침한 창고 같은 그곳엔 파리떼가 웽웽거리고 악취가 풍긴다. 김씨가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여동생 루리.... 그녀는 죽어서도 아름답다.

루리의 시신. 죽은 루리를 그린 그림
백추가 그린 부시도. 유튜브 캡쳐

김씨 앞으로 그림 한 점과 백추의 유서가 배달되는데 거기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벼랑에 매달린 루리를 그린 것은 다름 아닌 백추였다. 극한의 공포에 질린 그녀를 본 순간 백추는 창작욕이 타올라 그림을 그려댄다. 그것도 모자라 떨어져 죽은 그녀에게서 또다시 영감을 받아 그림을 하나 더 그린다. 그것이 김씨에게 배달된 백추의 유작, 부시도(腐屍圖)이다. 아울러 백추가 김씨에게 마지막으로 한 부탁은 루리의 죽은 모습이 담긴 그 그림을 세상에 꼭 발표해달라는 것이었다.

줄거리를 써놓고 보니 정말 소름끼치는 내용이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자신의 욕구만 채우는 인간이라니... 자기 목숨 자기가 갖다 바치는 거면 누가 뭐라 할까. 하지만 여기에선 희생양 루리만 불쌍할 뿐이다. 그놈의 예술 따위가 뭐라고.



원작 작가 김내성에 대해 찾아보다가 악마파와 비슷한 일본 소설을 알게 되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썼다는 '지옥변'. 위키백과에 따르면 1930년대에 일본에서 공부한 김내성이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한다. 자기 딸이 타 죽어 가고 있는데 감상하듯 바라보는 아비라니. 안 풀리던 그림을 드디어 완성하고 자살........

한 장면을 몇백번 찍어놓고 결국 처음 찍은 컷을 영화에 썼다는 감독도 생각나고 강ㄱ씬을 찍겠다며 실제 ㄱ간을 시킨 감독놈도 생각나고 여자한테 독약을 먹여서는 그 죽는 순간을 사진에 담은 놈도 생각나고..... 예술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하지만 사람 나고 예술 났지 예술 나고 사람 나겠는가.





처세술개론 - MBC 베스트셀러극장 (최정화 조현철)


어른과 있을 때는 천사표 같았다가 애들끼리 남게 되자 태도가 돌변하는 아이. 애들을 마구 괴롭히다가 어른이 나타나자 자기가 괴롭힘 당했다고 울고 불고 짜는 아이. 그 미친듯한 연기력에 질려 말도 못 하고 엉엉 우는 또 다른 아이.

아역 배우 최정화
한지붕 세가족에 나온 최정화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129회 "처세술개론"


: 1986년 9월 7일 방영. 최인호 원작. 조현철, 최정화, 이영후, 김혜자, 박원숙, 황정순 출연.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은 이 정도였다. 두 얼굴의 야누스를 기가 막히게 연기했던 어린이 배우는 곧 MBC 일요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서 주인집 딸로 나왔다. 이름을 찾아보니 최정화. 이 이름으로 베스트셀러극장 작품 목록을 검색해보니 두 편이 나온다. 그중 '한지붕 세가족' 전에 방영된 화는 "처세술개론".



지금은 고인이 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가 최인호 님의 원작 소설을 찾아보았다. 핵심 줄거리는 이렇다. 외국에서 부자 어르신이 돌아왔는데 친자식이 없다. 그 친척들은 콩고물(유산)을 기대하며 자신의 아이들로 어르신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아이들은 어르신 눈에 들어야 한다는 미션을 안고 있다.

할머니 옆에 붙어 앉아 재롱을 부리고 춤으로 홀리는 야누스 아이. 최정화가 얼마나 끔찍하게 연기를 잘했는지 나는 이 어린이 배우의 열렬한 안티가 되어버렸다. 당시에 학교 생활이 힘들어서 더 이입을 했을 것이다. 거짓말을 아주 잘하는 아이가 있었고 선생님은 관심 밖 아이들의 말을 잘 믿어주지 않았다. 풀지 못한 억울함이 쌓여있던 게 이 화를 보면서 터졌던 것 같다. 배우는 그저 연기를 잘했을 뿐인데.......

But! 이래 놓고는 한지붕 세가족을 매주 애청하면서 그녀의 팬이 되었다는 거 실화냐?😅 여기서는 아주 야무지고 귀엽게 나왔다. 인기도 많았었다. 한데 그 뒤로 잘 볼 수가 없었다. 근황을 궁금해다가 몇 년 뒤 MBC의 무슨 저녁 프로에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최정화는 연기를 그만두고 한국 무용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 인기를 뒤로 하고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고 있는 그녀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 이것도 아주 오래전이니.......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죠?




* 남자아이 역은 조현철이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배우로 활동했으며 '조성원'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현재는 조현철을 검색하면 가수 매드클라운의 동생인 영화배우가 단박에 나오지만 같은 이름의 배우가 이미 있었다는 사실)

배우 조현철. 조성원으로 개명
배우 조현철=조성원


- 조성원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onejoa/150012277905
- 최정화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beauniverse/220770895253

2023-10-19

보석 고르기 - MBC 베스트셀러극장 (임채무 김혜영)


마당 넓은 하숙집에 새로운 하숙생 임채무가 들어온다. 왠지 어렵게 공부하는 고학생 느낌이다. 주인집 딸 김혜영과 티격태격하다가 서로 좋아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이 하숙생의 정체는 재벌 2세?!

MBC 베스트셀러극장 보석 고르기 주연 배우 임채무 김혜영
임채무 / 김혜영. 출처 스포츠서울, 구글이미지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75회 '보석 고르기'


: 1985년 6월 16일 방영. 김창동 원작. 홍정원 극본. 윤정수 연출. 임채무, 김혜영, 전운, 김수미, 김용건, 신충식, 서권순, 김혜옥, 길용우, 김주영, 사상기, 문회원, 김광배, 전희룡, 박영지, 차윤회, 서영애, 윤석오, 이경순, 이순규, 원낭, 송영웅, 서명진 출연.


하숙집에 젊은 남자들이 늘 있으니 주인이 딸을 단속했던 것 같고 그 딸은 남자 보기를 돌 같이 했던 것 같다. 절약을 하다 못해 너무 아껴서 구질구질해 보이는 임채무를 처음에는 김혜영이 되게 싫어했던 것 같은데.... (어릴 적 기억에 의존해서 쓰다 보니 틀릴 수도 있다. 이 화는 정말 재밌게 보았어서 그나마 기억이 많이 나는 편이다)




아마 하숙집 주인도 딸의 연애를 반대하고 하숙생의 아버지인 재벌(아니면 굉장한 부자)도 아들의 연애를 반대했을 것이다. 임채무가 돈과 사랑 중에 사랑을 택하고 2세로서의 권리를 포기했던가? 그의 정체를 알고 나서 김혜영이 그를 떠나려고 했었나? 마지막 장면 만큼은 확실히 기억난다. 임채무가 리어카에 짐을 싣고 하숙집을 나서는데 거기에 김혜영이 올라타고 함께 가는 해피 엔딩~ 

지금은 두리랜드 운영하시느라 더 바쁜 임채무 님은 순정파 느낌의 미남이었다. 라디오 DJ로 유명한 김혜영 님은 당시 개그우먼으로 활동 중이었는데, 개그우먼이 드라마에 나오는 게 마냥 신기했었다. 미모도 미모지만 연기를 잘하셔서 더 기억에 남은 듯하다.

그나저나 MBC 베스트셀러극장도 인터넷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KBS처럼.


* MBC 드라마 '현정아 사랑해'도 설정이 비슷하다. 감우성이 재벌 3세, 김규리(김민선)가 그 상대 역인 조연출 PD로 나왔다. 





2023-10-18

일곱개의 장미 송이 - MBC 베스트셀러극장 (박은수 지윤성)


내용이나 장면이 수위 높았던 베스트셀러극장은 확실히 더 기억이 잘 난다. 이 '일곱 개의 장미 송이'는 둘 다 그랬다. 찾아보니 연출이 故 김종학 PD. 이 분하면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을 남긴, 연출자로서는 그야말로 최고 중에 최고가 아닌가.

박은수 / 원작 소설 표지

7개의 장미 송이 - MBC 베스트셀러 극장 제9회


: 1984년 1월 15일 방영. 김성종 원작. 김남 극본. 김종학 연출. 박은수, 지윤성, 홍성민, 김용건, 국정환, 박상조, 남영진, 김한섭, 송경철, 김영인, 최두열, 홍중기, 문회원, 윤석오, 박영지, 서권순, 박경순, 김순경, 최지원, 최현미, 정성모, 차재홍, 최한호, 최항석, 문창근 출연.


원작은 김성종의 추리소설이다. 어느 날 주인공의 부인이 자살을 한다. 그림을 그렸던 부인은 낯선 남자들의 초상화를 유서와 함께 남겨 놓았다. 자신을 강간한 놈들을 그려 놓은 것이다. 졸지에 부인을 잃은 주인공은 그림 속 남자들을 찾아 한 명씩 복수하기 시작한다.



극 중에서 박은수는 정말로 눈이 홱 돌아버린 사람 같았다. 핏발 선 눈으로 남자를 찾아내고, 죽이고 이 패턴이 반복된다. 달리는 열차에서 몇 번 째인지 모를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다 밀어내는 장면도 있었던 것 같다. 파란색 기운이 강했던 화면은 뭐였을까? 그 당시 우리집 TV는 흑백이었는데 친척집에서 봤나? 🙄

복수를 완성하고 나서 어떻게 됐더라? 경찰서를 찾아갔나? 아님 그걸로 끝?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기억이 안 나니 이거 참...... 드라이 아이스의 흰 냉기가 엄청 나온 장면이 있었는데 그건 또 뭐였을까? 오늘도 나는 궁금해!를 외칠 수밖에 없다.


배우 지윤성

* 부인 역의 배우가 '故 안옥희'인 줄 알았는데 위키 정보에는 "지윤성"으로 나온다. 이름도 생소하고 사진을 찾아봐도 누구신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내 기억이 맞을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지만 어디에 해보랴.  (지윤성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joopid)

배우 안옥희. Rest in Peace











* 예술가 외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 안옥희 님은 긴 머리를 손수건으로 묶고 이젤 앞에서 유화를 그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작가로 활동했다. 그림도 그리셨다고 들었다. 안타깝게도 39세에 요절했다. (안옥희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airlaw/)




2023-10-16

쉬쉬쉬잇 - MBC 베스트셀러극장 (박상조 한인수 오미연)


제목이 무엇인지 간절히 알고 싶었던 베스트셀러극장이 있었다. 

극이 막 전개가 되다가 컷! 소리와 함께 화면이 멈춘다. 카메라가 곧 빵떡모자를 쓴 사람한테로 옮겨간다. KTX 타고 가면서 봐도 감독이다. 그는 열을 내며 다른 스토리로 가보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화면이 거꾸로 감기고, 배우들이 빠르게 뒷걸음질 치며 장소를 벗어난다. 화면이 다시 정상 속도가 되고 다른 내용이 펼쳐진다. 남녀가 키스(?)를 하려는 순간 또 화면이 멈추고 감독은 또 막 뭐라고 한다. 다시 화면이 빠르게 되감기고.

주연 배우 한 분의 얼굴은 기억나는데 성함을 몰라서 당최 뒤져볼 수도 없었다. 찾는 것을 거의 포기했었는데 다른 단막극 정보를 찾아보다가 배우 분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야호~

배우 박상조
배우 박상조. 출처 플레이DB

제40회 MBC 베스트셀러극장 '쉬쉬쉬잇'


: 1984.9.9 방영. 이현화 원작. 허성수 극본. 정문수 연출. 한인수, 오미연, 박상조, 박소현, 박경현, 정호근 출연.


박상조 배우가 출연한 베스트셀러극장 20편 중에 세 편이 눈에 띄었다. 제40회 쉬쉬쉬잇, 제56회 손오공, 제65회 대역 인간. 손오공은 영상을 훑어보니 아니었고, 대역 인간은 캡처 화면을 보니 아니었다. 같은 제목의 원작 희곡에 대해 살펴보니 아무래도 이것이 내가 찾는 그 화?!




플레이DB에서 가져온 연극의 줄거리는 이렇다.

신혼여행을 온 남자. 그의 호텔방을 찾아온 낯선 사내.
신혼여행을 온 여자. 그녀의 호텔방을 찾아온 낯선 여인.
이들의 방문으로 인해 혼란의 신혼 첫날이 시작된다.


사람 코와 입만 그려져 있다
연극 쉬쉬쉬잇 2018년 포스터. 플레이DB

이현화 작가의 1976년작 '쉬쉬쉬잇'은 굉장히 실험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어느 분이 써놓은 희곡 감상평을 보니, 어떤 사건이 인물만 바뀌면서 반복되는데 급기야는 낯선 사내와 여인이 신혼부부 역할을 하고 신혼부부에게 자신들의 역할을 강요하기도 한다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장면도 얘기가 진행되다가 화면이 되감아지고 다시 또 얘기가 진행되다 되감아지는 식이었으니 이 작품이 맞겠구나~

사실 연극 대본을 구했지만 읽어보려니 A4 용지로 40장이 넘어서 우선은 접었다. 베스트셀러극장에선 박상조 배우가 감독으로 등장해서 이야기를 쥐락펴락 좌지우지했으니 각색이 많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드라마를 조금밖에 못 봐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감도 못 잡겠다. 연극 정보나 평을 읽어봐도 이건 극을 직접 봐야 알 것 같다. 이제 몇십 년 묵은 궁금증을 풀었으니 인터넷에 영상이 뜨기를 바라 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