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04

한 잎의 여자 - MBC 베스트극장 (김현정 천정명 이영호)


베스트셀러극장이 베스트극장으로 바뀌어도 MBC 단막극의 명성은 계속 이어졌다. 베스트셀러극장은 반드시 '원작'이 있어야 했다는데 베스트극장에선 그 굴레를 벗은 것이다. 단막극은 신인들의 등용문이자 무대였다. MBC가 드라마 왕국으로 군림할 때 베스트극장도 성했던 게 우연만은 아닐 텐데. 들인 비용에 비해 시청률이 낮으니(요즘말로 가성비가 Hell) 현재 공중파 TV 채널에서는 특집극을 제외하고 단막극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옥희의 머리에 붙어있는 나뭇잎을 떼어주는 손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486회 한 잎의 여자


: 2002. 4.12 방영. 고동선 연출. 신경희 극본. 김연희 윤색. 김현정, 천정명, 나문희, 이영호, 양택조, 이세은 출연.

'한 잎의 여자'하면 오규원의 시가 먼저 떠오른다. 시를 읽어보면 왠지 연약하고 순수한 여자가 연상되는데 화자의 시선에선 슬픔이 가득 느껴진다. 이해가 안 가는 표현도 있지만 시인은 고인이 되신지 오래라 물어볼 수가 없다. 아무튼 같은 제목의 베스트극장 주인공 옥희는 시 속의 여자와 닮은 느낌이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 스포일러 심합니다. 주의하세요 ===

옥희는 스물두살이지만 정신 연령은 열 살 정도에 머물러 있다. 엄마가 기차선로에서 놀고 있던 옥희를 밀쳐내고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 트라우마로 옥희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다행히 좀 사는 동네 아주머니가 옥희를 거둬 키워줬지만 옥희가 좋아하는 그 집 아들 성재는 옥희의 몸만을 탐할 뿐이다.

어느 날 동네에 봉수가 나타난다. 가겟집 아들인데 성재와 다투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 길로 고향을 떠나 조폭 막내 노릇을 하다가 상대 조직의 보스를 찌르고 집으로 도망 온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옥희가 그의 상처에 관심을 가져준다. 계산할 줄 모르고 천진난만한 옥희가 자꾸 그의 눈에 들어와 밟힌다.


봉수가 옥희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

봉수는 자신을 만나러 온 조폭 동료가 옥희를 끌고 가자 필사적으로 따라가 구해낸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다. 옥희의 오빠는 성재에서 봉수로 바뀐다. 봉수는 옥희를 지켜주고만 싶다. 하지만 이들을 둘러싼 현실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옥희는 자신이 아이를 가진 것도 모른다. 봉수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약속된 돈을 받고 상대 조직의 보스를 다시 죽이려 하다가 쫓기게 된 봉수는 옥희가 보고 싶어 하는 바다로 함께 도망을 가려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봉수를 쓰러뜨린 것은......




사실 20년 전에 본 기억만으로 리뷰를 쓰려고 했었다(여기는 드라마 기억 저장소니까). 한데 쓸만한 이미지가 없어서 캡쳐도 할 겸 다시 보다가 내 기억과 다른 게 많아서 깜짝 놀랐다. 옥희를 키워준 아주머니로 나온 배우가 김영옥 님이 아니라 나문희 님이었다. 마지막 장면도 옥희가 오빠를 부르면서 어딘가를 헤매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작 극에서는 옥희가 기차 플랫폼에 쭈그려 앉아 숫자를 세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르게 기억할 수가 있을까?


죽어가는 봉수와 봉수를 기다리는 옥희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

가장 깼던(?) 부분은 죽었다고만 생각한 봉수가 부감으로 잡은 장면에서 움직인 것이다. 아, 여운 바사삭! 그래도 얻은 게 있다면, 지금까지 옥희가 너~어무 불쌍했었는데 봉수가 살았을 수도 있으니 이 비극적인 커플에게 희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시 보아서 뭔가가 사라졌지만 또 뭔가가 생겼다. 쌤쌤(same same). (아직 안 보신 분께는 강력 추천! MBC 베스트극장은 웨이브에서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옥희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

실제로도 영혼이 맑아보이는 김현정 배우의 근황을 찾아보니 화가로 활동 중이었다. WOW! 천정명 배우는 2022년 6월에 주짓수 최고 레벨인 블랙 벨트를 받았다고 한다. WOW! 두 배우가 극에서 얼마나 풋풋한지 젊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아역배우 박은빈-이재응-이세영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다음이미지

* 박은빈 배우가 옥희의 아역으로 나온다. 깜놀! 가게에서 과자 훔치는 아이가 있었는데 얼굴을 보니 아역 배우 시절 연기 잘하기로 이름났던 이재응이다. 이세영 배우와 함께 나온 KBS TV문학관 '소나기'에서 소년 역을 했었다.

* 나쁜 오빠 성재 역의 이영호 배우가 쓴 '한 잎의 여자' 촬영 일기가 있다.
https://www.imbc.com/broad/tv/drama/best/best_note/1315669_2629.html

* 고동선 PD의 인터뷰를 보니 자신이 연출한 단막극 중에서 '한 잎의 여자'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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