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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3

악마파 - MBC 베스트셀러극장 (유인촌 조경환 황신혜)


현재까지 기억하고 있는 베스트셀러극장이 무엇인지 묻는 설문을 한다면 이 화가 베스트 5에는 들지 않을까? 제목은 기억 못 한다 해도 주연으로 나온 조경환의 흰 눈동자를 기억하는 분은 많을 듯하다. 나 역시 새하얗던 그의 한쪽 눈과 벼랑에 매달려 소리 지르던 황신혜만 기억이 선명한데, 유튜브에 설마 하고 찾아보니 있다! 유레카! (현재는 없음)


악마파 화가로 나온 조경환
노단 역을 맡은 조경환. 유튜브 캡쳐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98회 "악마파"


: 1985.12.22일 방영. 김래성(김내성) 원작. 유인촌, 조경환, 황신혜, 김용건 출연.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봤다. 30여년만에 다시 본 악마파는 솔직히 허술한 부분이 많았지만 스토리가 주는 충격만큼은 여전했다. 예술에 미쳐 인간성을 상실해버린 두 남자와 그 사이에서 희생되는 한 여자. 그 광기 어린 핏빛 이야기.

주요 인물은 네 명이다. 장애인에 가난하지만 그림에서만큼은 천재를 가진 백추(유인촌), 건장한 신체와 부를 가졌지만 그림에서는 밀리는 노단(조경환),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루리(황신혜), 그리고 루리의 친오빠이자 세 사람을 연결시키는 역할의 김씨(김용건).


유인촌 황신혜 김용건
왼쪽부터 유인촌, 황신혜, 김용건. 유튜브 캡쳐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백추와 노단은 악마파 성향을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물과 기름처럼 서로 대립한다. 두 사람 다 루리에게 첫눈에 반한다. 루리는 노단보다 백추를 마음에 들어 한다. 백추는 미술대전에서 상을 타며 천재성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축하하는 자리에서 루리에게 실망을 하고 사라져 버린다. 미전 수상작을 노단에게 남긴 채.


결혼하는 노단과 루리. 울부짖는 루리
황신혜, 조경환. 유튜브 캡쳐

모욕당했다고 여긴 노단은 질투심에 불타오른다. 백추가 죽었다고 생각한 루리는 오빠가 시키는대로 노단과 결혼한다. 노단은 루리를 모델로 부리며 영감을 받으려 애쓴다. 하지만 결과물이 신통치 않자 정신 나간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이부자리에서 죽은 쥐를 발견한 루리가 숨넘어가게 비명을 지르자 캔버스를 들고 달려와 그림을 그리기 바쁘다. 점점 미쳐가는 남편에게 기겁한 루리가 오빠를 찾아와 하소연하지만 하나뿐인 가족인 오빠는 마치 남 얘기 듣듯 한다(원작을 안 읽어 봐서 소설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드라마에서 그의 태도는 참... 오빠 맞아요?).




루리가 갑자기 사라지고, 루리를 찾아 헤매던 노단은 변사체로 발견된다. 그의 곁에는 그림이 한 점 있었는데, 여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벼랑에 매달려 있다. 이 생생한 그림은 노단의 유작으로 발표되어 그가 살아있을 때는 결코 얻지 못했던 명성을 가져다준다. 바로 이 전시회에 돌연 백추가 나타나고, 그는 김씨를 자신의 거처에 초대한다. 음침한 창고 같은 그곳엔 파리떼가 웽웽거리고 악취가 풍긴다. 김씨가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여동생 루리.... 그녀는 죽어서도 아름답다.

루리의 시신. 죽은 루리를 그린 그림
백추가 그린 부시도. 유튜브 캡쳐

김씨 앞으로 그림 한 점과 백추의 유서가 배달되는데 거기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있었다. 벼랑에 매달린 루리를 그린 것은 다름 아닌 백추였다. 극한의 공포에 질린 그녀를 본 순간 백추는 창작욕이 타올라 그림을 그려댄다. 그것도 모자라 떨어져 죽은 그녀에게서 또다시 영감을 받아 그림을 하나 더 그린다. 그것이 김씨에게 배달된 백추의 유작, 부시도(腐屍圖)이다. 아울러 백추가 김씨에게 마지막으로 한 부탁은 루리의 죽은 모습이 담긴 그 그림을 세상에 꼭 발표해달라는 것이었다.

줄거리를 써놓고 보니 정말 소름끼치는 내용이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데 자신의 욕구만 채우는 인간이라니... 자기 목숨 자기가 갖다 바치는 거면 누가 뭐라 할까. 하지만 여기에선 희생양 루리만 불쌍할 뿐이다. 그놈의 예술 따위가 뭐라고.



원작 작가 김내성에 대해 찾아보다가 악마파와 비슷한 일본 소설을 알게 되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썼다는 '지옥변'. 위키백과에 따르면 1930년대에 일본에서 공부한 김내성이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한다. 자기 딸이 타 죽어 가고 있는데 감상하듯 바라보는 아비라니. 안 풀리던 그림을 드디어 완성하고 자살........

한 장면을 몇백번 찍어놓고 결국 처음 찍은 컷을 영화에 썼다는 감독도 생각나고 강ㄱ씬을 찍겠다며 실제 ㄱ간을 시킨 감독놈도 생각나고 여자들에게 독약을 먹여서는 그 죽는 순간을 사진에 담은 놈도 생각나고..... 예술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하지만 사람 나고 예술 났지 예술 나고 사람 나겠는가.





처세술개론 - MBC 베스트셀러극장 (최정화 조현철)


어른과 있을 때는 천사표 같았다가 애들끼리 남게 되자 태도가 돌변하는 아이. 애들을 마구 괴롭히다가 어른이 나타나자 자기가 괴롭힘 당했다고 울고 불고 짜는 아이. 그 미친듯한 연기력에 질려 말도 못 하고 엉엉 우는 또 다른 아이.

아역 배우 최정화
한지붕 세가족에 나온 최정화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129회 "처세술개론"


: 1986년 9월 7일 방영. 최인호 원작. 조현철, 최정화, 이영후, 김혜자, 박원숙, 황정순 출연.

기억에 남아있는 장면은 이 정도였다. 두 얼굴의 야누스를 기가 막히게 연기했던 어린이 배우는 곧 MBC 일요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서 주인집 딸로 나왔다. 이름을 찾아보니 최정화. 이 이름으로 베스트셀러극장 작품 목록을 검색해보니 두 편이 나온다. 그중 '한지붕 세가족' 전에 방영된 화는 "처세술개론".



지금은 고인이 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가 최인호 님의 원작 소설을 찾아보았다. 핵심 줄거리는 이렇다. 외국에서 부자 어르신이 돌아왔는데 친자식이 없다. 그 친척들은 콩고물(유산)을 기대하며 자신의 아이들로 어르신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아이들은 어르신 눈에 들어야 한다는 미션을 안고 있다.

할머니 옆에 붙어 앉아 재롱을 부리고 춤으로 홀리는 야누스 아이. 최정화가 얼마나 끔찍하게 연기를 잘했는지 나는 이 어린이 배우의 열렬한 안티가 되어버렸다. 당시에 학교 생활이 힘들어서 더 이입을 했을 것이다. 거짓말을 아주 잘하는 아이가 있었고 선생님은 관심 밖 아이들의 말을 잘 믿어주지 않았다. 풀지 못한 억울함이 쌓여있던 게 이 화를 보면서 터졌던 것 같다. 배우는 그저 연기를 잘했을 뿐인데.......

But! 이래 놓고는 한지붕 세가족을 매주 애청하면서 그녀의 팬이 되었다는 거 실화냐?😅 여기서는 아주 야무지고 귀엽게 나왔다. 인기도 많았었다. 한데 그 뒤로 잘 볼 수가 없었다. 근황을 궁금해다가 몇 년 뒤 MBC의 무슨 저녁 프로에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최정화는 연기를 그만두고 한국 무용을 전공하고 있었다. 그 인기를 뒤로 하고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고 있는 그녀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 이것도 아주 오래전이니....... 어디선가 잘 살고 있겠죠?




* 남자아이 역은 조현철이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배우로 활동했으며 '조성원'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현재는 조현철을 검색하면 가수 매드클라운의 동생인 영화배우가 단박에 나오지만 같은 이름의 배우가 이미 있었다는 사실)

배우 조현철. 조성원으로 개명
배우 조현철=조성원


- 조성원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onejoa/150012277905
- 최정화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beauniverse/220770895253

2023-10-19

보석 고르기 - MBC 베스트셀러극장 (임채무 김혜영)


마당 넓은 하숙집에 새로운 하숙생 임채무가 들어온다. 왠지 어렵게 공부하는 고학생 느낌이다. 주인집 딸 김혜영과 티격태격하다가 서로 좋아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이 하숙생의 정체는 재벌 2세?!

MBC 베스트셀러극장 보석 고르기 주연 배우 임채무 김혜영
임채무 / 김혜영. 출처 스포츠서울, 구글이미지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75회 '보석 고르기'


: 1985년 6월 16일 방영. 김창동 원작. 홍정원 극본. 윤정수 연출. 임채무, 김혜영, 전운, 김수미, 김용건, 신충식, 서권순, 김혜옥, 길용우, 김주영, 사상기, 문회원, 김광배, 전희룡, 박영지, 차윤회, 서영애, 윤석오, 이경순, 이순규, 원낭, 송영웅, 서명진 출연.


하숙집에 젊은 남자들이 늘 있으니 주인이 딸을 단속했던 것 같고 그 딸은 남자 보기를 돌 같이 했던 것 같다. 절약을 하다 못해 너무 아껴서 구질구질해 보이는 임채무를 처음에는 김혜영이 되게 싫어했던 것 같은데.... (어릴 적 기억에 의존해서 쓰다 보니 틀릴 수도 있다. 이 화는 정말 재밌게 보았어서 그나마 기억이 많이 나는 편이다)




아마 하숙집 주인도 딸의 연애를 반대하고 하숙생의 아버지인 재벌(아니면 굉장한 부자)도 아들의 연애를 반대했을 것이다. 임채무가 돈과 사랑 중에 사랑을 택하고 2세로서의 권리를 포기했던가? 그의 정체를 알고 나서 김혜영이 그를 떠나려고 했었나? 마지막 장면 만큼은 확실히 기억난다. 임채무가 리어카에 짐을 싣고 하숙집을 나서는데 거기에 김혜영이 올라타고 함께 가는 해피 엔딩~ 

지금은 두리랜드 운영하시느라 더 바쁜 임채무 님은 순정파 느낌의 미남이었다. 라디오 DJ로 유명한 김혜영 님은 당시 개그우먼으로 활동 중이었는데, 개그우먼이 드라마에 나오는 게 마냥 신기했었다. 미모도 미모지만 연기를 잘하셔서 더 기억에 남은 듯하다.

그나저나 MBC 베스트셀러극장도 인터넷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KBS처럼.


* MBC 드라마 '현정아 사랑해'도 설정이 비슷하다. 감우성이 재벌 3세, 김규리(김민선)가 그 상대 역인 조연출 PD로 나왔다. 





2023-10-18

일곱개의 장미 송이 - MBC 베스트셀러극장 (박은수 지윤성)


내용이나 장면이 수위 높았던 베스트셀러극장은 확실히 더 기억이 잘 난다. 이 '일곱 개의 장미 송이'는 둘 다 그랬다. 찾아보니 연출이 故 김종학 PD. 이 분하면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을 남긴, 연출자로서는 그야말로 최고 중에 최고가 아닌가.

박은수 / 원작 소설 표지

7개의 장미 송이 - MBC 베스트셀러 극장 제9회


: 1984년 1월 15일 방영. 김성종 원작. 김남 극본. 김종학 연출. 박은수, 지윤성, 홍성민, 김용건, 국정환, 박상조, 남영진, 김한섭, 송경철, 김영인, 최두열, 홍중기, 문회원, 윤석오, 박영지, 서권순, 박경순, 김순경, 최지원, 최현미, 정성모, 차재홍, 최한호, 최항석, 문창근 출연.


원작은 김성종의 추리소설이다. 어느 날 주인공의 부인이 자살을 한다. 그림을 그렸던 부인은 낯선 남자들의 초상화를 유서와 함께 남겨 놓았다. 자신을 강간한 놈들을 그려 놓은 것이다. 졸지에 부인을 잃은 주인공은 그림 속 남자들을 찾아 한 명씩 복수하기 시작한다.



극 중에서 박은수는 정말로 눈이 홱 돌아버린 사람 같았다. 핏발 선 눈으로 남자를 찾아내고, 죽이고 이 패턴이 반복된다. 달리는 열차에서 몇 번 째인지 모를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다 밀어내는 장면도 있었던 것 같다. 파란색 기운이 강했던 화면은 뭐였을까? 그 당시 우리집 TV는 흑백이었는데 친척집에서 봤나? 🙄

복수를 완성하고 나서 어떻게 됐더라? 경찰서를 찾아갔나? 아님 그걸로 끝?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기억이 안 나니 이거 참...... 드라이 아이스의 흰 냉기가 엄청 나온 장면이 있었는데 그건 또 뭐였을까? 오늘도 나는 궁금해!를 외칠 수밖에 없다.


배우 지윤성

* 부인 역의 배우가 '故 안옥희'인 줄 알았는데 위키 정보에는 "지윤성"으로 나온다. 이름도 생소하고 사진을 찾아봐도 누구신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내 기억이 맞을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지만 어디에 해보랴.  (지윤성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joopid)

배우 안옥희. Rest in Peace











* 예술가 외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 안옥희 님은 긴 머리를 손수건으로 묶고 이젤 앞에서 유화를 그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실제로 작가로 활동했다. 그림도 그리셨다고 들었다. 안타깝게도 39세에 요절했다. (안옥희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airlaw/)




2023-10-16

쉬쉬쉬잇 - MBC 베스트셀러극장 (박상조 한인수 오미연)


제목이 무엇인지 간절히 알고 싶었던 베스트셀러극장이 있었다. 

극이 막 전개가 되다가 컷! 소리와 함께 화면이 멈춘다. 카메라가 곧 빵떡모자를 쓴 사람한테로 옮겨간다. KTX 타고 가면서 봐도 감독이다. 그는 열을 내며 다른 스토리로 가보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화면이 거꾸로 감기고, 배우들이 빠르게 뒷걸음질 치며 장소를 벗어난다. 화면이 다시 정상 속도가 되고 다른 내용이 펼쳐진다. 남녀가 키스(?)를 하려는 순간 또 화면이 멈추고 감독은 또 막 뭐라고 한다. 다시 화면이 빠르게 되감기고.

주연 배우 한 분의 얼굴은 기억나는데 성함을 몰라서 당최 뒤져볼 수도 없었다. 찾는 것을 거의 포기했었는데 다른 단막극 정보를 찾아보다가 배우 분 이름을 알게 되었다! 야호~

배우 박상조
배우 박상조. 출처 플레이DB

제40회 MBC 베스트셀러극장 '쉬쉬쉬잇'


: 1984.9.9 방영. 이현화 원작. 허성수 극본. 정문수 연출. 한인수, 오미연, 박상조, 박소현, 박경현, 정호근 출연.


박상조 배우가 출연한 베스트셀러극장 20편 중에 세 편이 눈에 띄었다. 제40회 쉬쉬쉬잇, 제56회 손오공, 제65회 대역 인간. 손오공은 영상을 훑어보니 아니었고, 대역 인간은 캡처 화면을 보니 아니었다. 같은 제목의 원작 희곡에 대해 살펴보니 아무래도 이것이 내가 찾는 그 화?!




플레이DB에서 가져온 연극의 줄거리는 이렇다.

신혼여행을 온 남자. 그의 호텔방을 찾아온 낯선 사내.
신혼여행을 온 여자. 그녀의 호텔방을 찾아온 낯선 여인.
이들의 방문으로 인해 혼란의 신혼 첫날이 시작된다.


사람 코와 입만 그려져 있다
연극 쉬쉬쉬잇 2018년 포스터. 플레이DB

이현화 작가의 1976년작 '쉬쉬쉬잇'은 굉장히 실험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어느 분이 써놓은 희곡 감상평을 보니, 어떤 사건이 인물만 바뀌면서 반복되는데 급기야는 낯선 사내와 여인이 신혼부부 역할을 하고 신혼부부에게 자신들의 역할을 강요하기도 한다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장면도 얘기가 진행되다가 화면이 되감아지고 다시 또 얘기가 진행되다 되감아지는 식이었으니 이 작품이 맞겠구나~

사실 연극 대본을 구했지만 읽어보려니 A4 용지로 40장이 넘어서 우선은 접었다. 베스트셀러극장에선 박상조 배우가 감독으로 등장해서 이야기를 쥐락펴락 좌지우지했으니 각색이 많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드라마를 조금밖에 못 봐서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감도 못 잡겠다. 연극 정보나 평을 읽어봐도 이건 극을 직접 봐야 알 것 같다. 이제 몇십 년 묵은 궁금증을 풀었으니 인터넷에 영상이 뜨기를 바라 볼까나?



2023-10-15

그 얼굴 - MBC 베스트셀러극장 (박찬환 김청)


MBC 단막극 '베스트셀러극장'을 정말 좋아했었다. 매주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기대가 컸다. KBS 단막극 '드라마게임'도 열혈 애청자였다. 아니, 드라마라면 다 좋아했다. 초등학생이 보기엔 부적절하고 수위 높은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열심히 보았었다. 엄마가 못 보게 하지 않았으니 그랬겠지만. 같이 보다가 재미없다고 채널을 돌리거나 티브이를 끄게 한 적은 있다. 그때 속상했었던 게 아직도 생각이 난다.


kbs 드라마스페셜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박찬환
배우 박찬환. 출처 KBS 홈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251회 그 얼굴


: 1989. 5. 14 방영. 마츠모토 세이초 원작. 박찬환, 김청, 이종남, 차주옥 출연.


역시나 파편처럼 머릿속을 떠다니는 베스트셀러극장 장면들이 꽤 있는데 이 작품도 그렇다. 박찬환이 코피를 흘리던 모습만 남아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갑자기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장면이다. 자신이 몰래 저지른 살인이 떠오르면 코피가 난다. 언제 들킬지 모르는 두려움과 죄책감을 영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겠지만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 어김없이 떨어지는 코피가 꽤 공포스러웠나 보다. 코피만 선명하게 남은 것을 보면.



베스트셀러극장 정보를 찾아보다 위키백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상세하게 정리를 해놓았을 줄이야. 위키백과에서 박찬환으로 검색해보니 여섯 편이 나오는데 제목들이 다 생소하다. 그러다 어느 한 편의 원작 작가를 보고 유레카를 외칠 뻔했다. 마츠모토 세이초.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니까 혹시 이것이 내가 찾는?!

1989년 5월 14일에 방영된 [그 얼굴]. 원작 소설 제목은 '얼굴'.

줄거리를 찾아보니 사람을 죽이러 가는 길에 아는 사람과 마주쳐서 그 사람도 죽인다...고. 아무래도 이게 맞는 것 같다. 식당에서 틀어놓은 TV에서 살인 사건 뉴스가 나오자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게 코피를 흘린다. 먹고 있던 국밥(혹은 설렁탕) 위로 뚝뚝. 솔직히 말해 비위가 상해서 더 기억에 남은 장면이다.

박찬환 배우는 스마트한 이미지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얼굴을 가졌다. 웃을 땐 따뜻해 보이다가도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차가운 기운이 매력적이라고 할까. 나쁜 놈 역할을 해도 필시 무슨 사연이 있을 듯한 느낌. 생각난 김에 다시 보고 싶다.



얼굴 - MBC 베스트셀러극장 (김광배 남능미)


한 젊은이가 연상의 여성 사업가를 만나 인생 역전을 꿈꾼다. 나이 들어 보이게 옷을 입고 분장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성형 수술까지. 부인이 된 여성은 거액의 재산을 남기고 죽는다. 한데 남편이 그 재산을 가질 수 없다?!

배우 김광배와 남능미
김광배, 남능미. 출처 피플검색, 뉴스엔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93회 - 얼굴


: 1985. 11. 17일 방영. 김문옥 연출. 김광배, 남능미, 김혜영, 나종미 출연.


이 화도 내용만 알고 제목을 몰랐다. 주연 배우를 이원용, 남능미로 기억하고 있어서 두 분이 함께 나온 화를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두 분 중 남능미 배우가 나온 것은 틀림없기에 이 분이 나온 베스트셀러극장을 하나씩 뒤져보았다. 그중에 '김광배'라는 배우와 함께 나온 '얼굴'이 유력해 보였는데 포탈에는 이 배우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김광배 배우의 얼굴을 확인해보기 위해 출연작들을 뒤져보다가 어렵게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기억 속의 남자와 닮았다!

더 대박은 구글에서 '김광배 남능미'로 검색하자 이 화를 직접 연출한 감독님의 글이 걸려 나온 것이다. 유레카! [김문옥-영화와 TV연출를 동시에 해야 할 팔자로 만들어준 "얼굴"] 이 글에 자세히 나와있는 줄거리를 일부 옮겨 본다.



영화 단역 배우인 최민섭은 가난하지만 꿈이 있는 소박한 청년이다. 그러나 성공해 보겠다는 일념은 부잣집 아가씨인 나영에게 딱지를 맞은 뒤에 더욱 굳어진다. 그때 묘한 인연으로 10년 연상의 과부 김여사를 만난다. 모처럼 잡은 행운을 놓칠세라 그는 김여사와 결혼을 한다. 부인보다 연하인 것을 감추기 위해 늙은 분장을 하고 부인은 젊은 화장을 날마다 하게 된다. 노소의 시차를 메꾸기 위해 둘은 성형수술, 의상 등으로 어처구니없는 곡예를 벌인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은 암으로 죽게 되고 혼자 남은 민섭은 쾌제를 부른다. 이젠 김여사의 유산으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 늙게 변한 그를 청년 최민섭으로 받아 주지 않는다. 유산도 알고 보니........

남자가 검은 머리를 허옇게 만들고, 얼굴에 주름과 검버섯을 그리고, 금테 안경에 노숙해보이는 양복을 골라 입으며 늙어 보일수록 신나 하던 게 생각난다. 급기야 연상의 부인보다 남자가 더 늙어 보이는 지경이 되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커플에게 뒤따르는 것은 사람들의 쑥덕거림 뿐.

그러다 부인이 죽고나서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이 안 났는데 윗글 덕분에 궁금증을 풀었다. 아울러 여러 비화까지 덤으로 알게 되어 정말 감사하다. 사악한 욕심을 부리다가 '젊음'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제 손으로 망가뜨려버린 어리석은 인간의 이야기. 그가 잃은 것은 비단 젊음만이 아니었다.

* 베스트셀러극장이 왜 '베스트셀러' 극장인지 이제야 알았다. 반드시 '원작'이 있어야 한다고. 이럴 수가, 그래서 베스트셀러극장이었다니.😲

* 박찬환 주연의 '그 얼굴' 리뷰는 여기를 클릭해주세요.



이혼 파티 - MBC 베스트셀러극장 (정혜선 오승명)


부부가 대화를 할 때마다 불꽃이 튄다. 서로에게 던지는 말에 뼈가 있고 가시가 잔뜩 돋쳐있다. 여차하면 서로 물어 뜯을 기세다. 그런데 둘이 정말 싫어하는 거 맞아?

이혼파티에서 부부로 나온 정혜선과 오승명
배우 정혜선, 오승명. 다음이미지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74회 이혼파티


: 1985년 6월 9일 방영. 유보상 원작. 박철수 연출. 정혜선, 오승명 주연.


의사 부인과 대학교수 남편. 그들은 틈만 나면 싸운다. 왜 싸우는지 기억이 안 나서 원작을 찾아보니 무려 1977년에 처음 상연된 연극! 희곡이 원작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에 나와있는 이혼 파티의 줄거리 일부를 가져와본다.

.......그러한 어느 날 민병욱의 한마디 실수로 아내와의 냉전이 시작된다. 어쩌다 민병욱의 입에서 튀어나온 '개 같은 ㄴ' 이 한마디는 윤지영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고, 지금까지 존경해왔던 남편의 위치는 천하게 멸시를 받게 된다. 부부의 냉전은 날로 심각하게 전개된다. 이러한 가운데 민병욱은 윤지영의 사생활에 대해 불만이 쌓이면서 뭔가 위축됨을 느낀다. 묘한 피해의식에 고민을 한다. 몇 번이나 아내와의 화해를 요구해봤지만 아내는 여전히 싸늘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민병욱은 뜻밖의 사람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아내의 제자 문달호이다. 그는 남자 간호사로 아내의 병원에 일하러 왔다. 민병욱은 그를 아내의 내연남으로 단정 짓고 두 사람을 열심히 훔쳐본다. 민병욱은 망상에 사로잡힌다. 언젠가 아내의 손에 지능적으로 살해될 것만 같은 느낌. 

남편이 진료실(?) 문을 벌컥 열자 젊은 남자가 부인의 손목을 잡고 있던 장면이 있었던 것 같고... 부인이 가져다준 음식을 고양이(혹은 개)에게 주니 고양이가 죽어있는 (상상) 장면도 있었던 것 같고... 줄거리를 읽고 기억을 짜내 본 거라 아닐 수도 있다.

확실히 생각나는 건 근사해 보이는 실내에 파티 준비를 해놓고 남편이 이혼 얘기를 꺼내려 한다. 흰 샤워가운 차림의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여행을 온 느낌인데 부인이 갑자기 헛구역질을 한다. 드라마에서 헛구역질은 뭐다?! 임신~~~




부인이 진료 받는 장면조차 바람피우는 것으로 의심했던 남편은 그간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기쁨에 들떠서는 "◯◯파티다!" 외치는데 대체 뭐라고 한 건지 모르겠다. 재혼 파티? 임신 파티? 재결합 파티? 빙하가 단 몇 초만에 녹아버리는 느낌으로 끝난 결말이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다.


* 이 화를 찍을 당시 배우 분들 실제 나이를 계산해보니 만 나이로 정혜선 님이 43세, 오승명 님이 39세. 솔직히 남자 배우분 나이가 더 많은 줄 알았다.

* 박철수 감독님이 베스트셀러극장 연출을 많이 하셨다. 감독님의 영화 중에 '서울 에비타'라는 1991년도 작품이 있는데 여기에 정혜선, 오승명 두 배우 분이 함께 나온다. 베스트셀러극장 인연이려나? 안타깝게도 감독님은 2013년에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돌아가셨다고 한다.

* 배우 오승명 님 2024. 08. 25 소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배우 정진 (+ 낙지 같은 여자 이야기)

배우 정진이 환하게 웃고 있다


제목을 모르는 베스트셀러극장.

기억에 남은 건, 현재는 작고하신 배우 정진 님이 산낙지를 생으로 마구 먹던 장면. 카메라가 줄곧 클로즈업을 하고 있었으니 이것은 실제로 먹은 것이었다. 채반에서 꿈틀대고 있는 낙지를 다 먹으면 돈 10만 원이었나 얼마를 주겠다는 내기였는데 그는 결국 승자가 되었다. 그 뒤로 토하는 장면이 나왔고 기억은 여기까지.




혹시나 이 장면에 대한 정보가 있을까 해서 검색을 해보니 오래된 기사가 하나 걸려 나왔다. MBC 베스트셀러극장 '낙지 같은 여자 이야기'에서 정진 님이 화제의 낙지 먹방을 펼쳤다는 것. 그래서 이 화에 대해 찾아보니 주인공을 맡은 송옥숙 배우(가 낙지 먹은 연기를 펼친) 얘기만 나온다. 캡처 이미지에도 정진 님은 보이지 않는다. 내용 역시 '낙지 같은 여자'의 비극적인 삶에 대한 것이다. 문제의 장면이 나온 화에서는 정진 님이 주인공 같았는데.... 이 느낌을 떨칠 수가 없어서 기사의 내용을 믿지 못하고 있다.

정진 님이 나온 12편의 베스트셀러극장에 대해 찾아보았다. '겨울 아리랑'과 '시선에 대하여'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것으로 추정되나 검색해봐도 별 정보가 없다. '낙지 같은 여자 이야기'를 당장 볼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아, 궁금해.

* 낙지 같은 여자 이야기 
: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39회. 1984년 9월 2일 방영. 송옥숙, 이정길 주연. 한승원 원작. 상세한 줄거리 https://dprime.kr/g2/bbs/board.php?bo_table=comm&wr_id=6109500




* 정진 님이 연기한 인물 중에 한명회(MBC 조선왕조 500년 설중매)가 있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 왕이 있는 방향으로 절을 하는데 슬픔 후회 체념 등 여러 감정이 느껴지던 그 표정이 잊히지가 않는다. 그때 인상이 강했던 탓에 훗날 이덕화의 한명회에는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화당리 솟례 - MBC 베스트셀러극장 (최민경 김주승)


솟례.
참으로 특이한 이름이다. 이런 이름을 누가 어떻게 왜 짓게 되었을까?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은 처음부터 그냥 솟례이다. 머리에 꽃을 달고 다니는, 어딘가 모자란 처자. 어딜 가나 시선을 집중시키며 구름처럼 아이들을 몰고 다니는 존재. 좋게 말하면 인싸(인사이더. 사람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지만 대놓고 말하면 동네 사람들의 '밥'이다. 특히 남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머리에 꽃을 꽂은 솟례
'화당리 솟례' 솟례로 나온 최민경. 유튜브 캡처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136회 화당리 솟례


: 1986.11.09 방영. 천승세 원작. 윤시몬 극본. 장수봉 연출. 최민경, 정진, 김주승, 남능미, 안명숙, 김영옥, 박종관, 이계인, 김성찬, 송경철, 박상조, 고영준, 김지영, 정대홍, 문회원, 박희우, 김지원, 박순애, 정혜승, 정명환, 김영석, 맹찬재, 조현이, 이경아 출연.


서울로 도망갔던 솟례가 화당리로 돌아오면서 극은 시작된다. 말하는 것을 보면 구걸로 연명한 느낌인데, 지적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여자가 한두달도 아니고 1년씩이나 도시에서 어떻게 버텼을지 정말 의문스럽다. 원작 소설을 읽어보면 의문이 풀릴까? 그뿐 아니라 왜 집을 떠났는지, 왜 다시 돌아왔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는 설명을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솟례가 종잡을 수 없이 행동하는 바보라고 해도 말이다.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아무튼 솟례의 삶에 비극이 싹튼 건 꽃미남 김주승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뒤부터이다. 극 중 이름을 모르겠는 김주승은 솟례를 보고 한번 웃어주었을 뿐이다. 그 순간부터 솟례에게는 오로지 김주승 뿐이다. 그가 다니는 학교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집을 찾아가 스토커처럼 그를 엿본다. 그와 결혼하는 게 인생 최대의 목표가 되어버린 솟례. 세상이 멸망해도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정작 그녀만 모른다.

이런 솟례를 가족처럼 챙겨주는 아주머니가 있어 다행이다 싶었는데, 덕분에 예뻐진 솟례에게 남자들이 대놓고 흑심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솟례가 원하는 것을 주겠다며 그녀의 몸을 탐하는 개자슥들. 솟례는 그렇게 얻어낸 카메라를 김주승에서 떠맡기듯 주지만, 카메라를 갖고 있는 것은 솟례가 친언니처럼 생각했던 아주머니의 딸이었다.



사실 그 카메라가 그 카메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생긴 게 똑같은 각각의 카메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강간으로 자신이 더럽혀졌다고 생각한 솟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김주승과 아주머니 딸이 결혼하는 장면은 솟례의 상상일 수도 있고 실제일 수도 있다. 일이 왜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누구를 무엇을 탓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솟례. 그래서 그녀가 더 불쌍하게 느껴질 뿐이다.

만약 공중파 단막극이 아니었다면 남자들이 솟례를 탐하는 게 더욱 노골적으로 묘사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솟례를 키워준 할아버지도 '안아준다'는 표현을 쓰는데 성적인 암시가 담긴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아리송하다. 약자 중에서도 약자가 산산이 부서지는 이야기. 세상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제대로 된 보호막이 없는 약자에게는 그저 비정하고 살벌한 곳일 뿐이다.


화당리 솟례에 나온 김주승 배우
지금은 고인이 된 배우 김주승. 유튜브 캡처


우리들의 넝쿨 - MBC 베스트셀러극장 (이원용 정호근 정한헌)


성공하겠다는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세 젊은이. 인력 시장에서 만난 이들은 서로에게 친구이자 동지가 된다. 중국집, 이발소, 여관에 일자리를 얻은 세 사람은 과연 꿈을 이룰 수 있을까?

덕배가 나무젓가락을 입에 물고 있다
덕배 역의 이원용. 유튜브 캡쳐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106회 우리들의 넝쿨


: 1986.03.23 방영. 최일남 소설 '우리들의 넝쿨' 원작. 오재호 극본. 김문옥 연출.
이원용, 정호근, 정한헌, 김용선, 김청, 김인문, 홍순창, 김애경, 노경주 출연.


중국집에서 배달원으로 일하는 덕배는 주인아주머니와 돈 많은 여자의 유혹을 받는다. 이발소에서 일하는 춘식은 면도사를 좋아하지만 그녀를 노리는 VIP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여관에서 일하는 길남은 미용실에서 일하는 여자친구에게 돈을 맡긴다. 어째 설정만 봐도 불안불안하다.




친구의 여친이 힘을 가진 남자에게 휘둘리는 것을 본 덕배는 그에게 달려들었다가 병원 신세만 지게 된다. 면도사에게서 VIP를 떼어놓으려던 춘식은 급기야 칼을 쓰고 감옥에 간다. 길남은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된다. 세 명의 젊은이로 대변되는 가난, 약자, 정의가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부, 기득권, 불의와 부딪힌다. 바위에 던져진 계란 같은 존재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절망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다.

이야기가 왠지 낯익다 했더니 이장호 감독의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과 원작이 같다(최일남의 소설은 1995년에도 SBS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주인공 안성기의 연기가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영화와 이 화를 비교해서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아울러 1980년대 서울 풍경 보는 재미도 쏠쏠. 영화 나인하프위크 간판이 반갑다(?).


* 서핑을 하다 보니 김문옥 감독님이 이 화에 대해 쓰신 글이 있었다.
episode 224 적기가 뜨고, 공습경보가 울려도 공포속에 촬영은 계속해야 한다!! - 뉴스캔 (newscani.com)


촬영하는 중에 사이렌이 울리고 북한에서 전투기가 날아와서 난리가 났었다고.
(수정 - 이웅평 대위는 1983년 귀순, 1986년엔 중국 진보충 대위 귀순)
그날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사이렌이 울리더니 화면 가득 자막이 뜨고 가족 모두 화장실로 대피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처구니없지만 그땐 얼마나 무서웠던지.

+) 이원용 배우에 대한 후일담
episode 114 어려운 시절에 힘들여 만든 작품의 마지막에 남는 감회는 차리리 눈물이었다 - 뉴스캔 (newscani.com)



2023-10-10

잃어버린 너 - MBC 베스트셀러극장 (권재희 노주현)

1987년에 출간되어 엄청난 인기를 끈 소설이 있었다. <잃어버린 너>. 수업 시간에 읽다가 울던 애도 있었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혜성처럼 나타난 러브스토리가 전국을 뜨겁게 달궜었는데, 이 소설의 인기 몰이에는 베스트셀러극장도 한 몫하지 않았을까?


잃어버린 너 영화 타이틀
잃어버린 너 영화 타이틀. 유튜브 캡처


잃어버린 너 -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158회

: 1987년 5월 3일 방영. 김윤희 원작. 노주현, 권재희 주연.


당시 스틸을 찾아보려니 1991년에 만들어진 영화 관련 사진만 잔뜩 나온다. 사실 저 제목 타이틀도 영화에서 가져왔다. 베스트셀러극장판 남자 주인공이었던 노주현 사진이라도 있을 줄 알았더니 이렇게 찾기 힘들 줄이야. 김혜수, 강석우 주연의 영화도 보았는데 기억 속에는 노주현과 김혜수가 진하게 남아있다. 아마도 두 사람이 함께 나왔던 KBS 주말드라마 '꽃 피고 새 울면' 영향 때문일 것이다. (그냥 봐도 아버지와 딸 같은 두 사람이 부부로 나오는 게 너무 이상하고 징그러워서 기억에 박혀버렸다)



사실 드라마와 영화가 뒤섞여 버렸다. 가린 것을 벗겨내자 흉터가 극심한 얼굴이 드러나는 것은 노주현이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강석우였다가 노주현이었다가 왔다 갔다 한다. 병실에 왜 큰 가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둘 중 누군가가 그것으로 링거 줄을 잘라서 그리로 피가 흘러나와 침대 옆으로 뚝뚝 떨어지던 장면이 선명하다. 이 또한 드라마 장면인지 영화 장면인지 헷갈릴 뿐이고.


잃어버린 너에서 주인공을 맡은 권재희
배우 권재희. 출처 SBS 연예뉴스


'권재희'라는 배우를 여기서 처음 보았다. 참으로 착하고 순수해보이는 인상이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죽은 줄 알고 절규하는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아... 영화의 힘이 너무 세다. 장면이 뒤죽박죽.

원작 소설을 쓰신 김윤희님은 2007년에 고인이 되셨다. 소설 내용이 100% 다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사랑'이 뭔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윤희는 충식과 함께 하려 했고 충식은 윤희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려 했다. 어찌 됐든 둘 다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 권재희 배우의 아버지 고 권재혁 님은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다. 2014년 45년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관련 기사 [단독 인터뷰] 배우 권재희의 고백 "저는 사형수의 딸입니다"




손오공 - MBC 베스트셀러극장 (한인수 김청 지윤성)

선양그룹의 실질적인 후계자 손오억 전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여직원들에게 추파를 던질 시간은 있다. 세상 다 가진 듯한 그에게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긴다. 누가 한 발 앞서서 그의 일정을 해치우고 있는 것이다. 쫓아가 보니 놀랍게도 그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다. 급기야 가짜 손오억은 전무실과 집까지 차지하고, 사람들은 진짜 손오억을 알아보지 못한다.


MBC 베스트셀러극장 손오공. 한인수. 유튜브 캡쳐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56회 손오공


: 1985.01.20 방영. 이동하 원작. 김송원 연출. 황정한 극본. 한인수, 김청, 지윤성, 박상조, 전운, 문회원, 국정환, 허기호, 신충식, 홍순창, 김명희, 차윤회, 김순경, 정은숙, 이정미, 최영수, 최재호, 노정아 출연.


제목을 모르겠는 베스트셀러극장을 찾아 헤매다 보게 되었는데 이럴 수가! 그 옛날(?)에 도플갱어를 다룬 작품이 있었다니! 도플갱어(doppelganger)는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으로 둘이 만나면 하나는 죽는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얘기가 있다. 이를 소재로 하는 영화만 몇 편인지. 드라마나 소설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대개는 공포물. '나'는 분명 따로 있는데 나와 똑같은 존재가 나타나 내 모든 것을 차지한다면? 신기함 보다는 두려움과 공포가 앞설 듯 하다.

이 작품을 보고 나니 원작 소설이 몹시 읽고 싶어졌다. 진행이 매끄럽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어서다. 예를 들면 진짜 손오억이 극 초반에 '미스 오'라는 말단 직원을 해고하는데, 나중에 그녀를 발견하고 기차를 따라 탔다가 투신하려는 그녀를 구한다. 진짜 손오억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으니 이름까지 먼저 얘기한다. 사실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을 알고 있으면 당황스러울 것 같은데, 미스 오에게 그런 기색은커녕 그를 자기 고향집으로 데려간다.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되니 그런 것이겠지만 과연 소설에서도 이런지 궁금하다. 또 진짜 손오억과 가짜 손오억이 한참 얘기를 나눈 뒤 진짜 손오억이 손오억이기를 포기하는 장면도 원작에서는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내용이라 각색하는 데에 아주 힘들었을 듯 하다. 극 후반부에서는 TV문학관 '꿈'도 연상된다. 손오억은 '또 다른 나'로 인해 지금까지의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서 결국 나를 찾은 것일까, 나를 잃은 것일까? 애매한 결말이 생각할 거리를 안겨 준다.


* 솔직히 '이동하'라는 작가를 이번에 처음 알았다. 손오공을 찾아보니 1976년 한국문학 7월호에 실려 있다. 2023년 현재 나온 지 최소 47년 된 소설이다. 실려있는 책을 찾으려면 발품이 필요하겠다. 작가 분에 대해 더 찾아보니 "장난감 도시"라는 연작 장편 소설이 대표작이라고 한다. 


MBC 베스트셀러극장 손오공. 지윤성. 유튜브 캡쳐

* 회장의 딸이자 손오억의 부인 역할을 한 분이 안옥희 배우인 줄 알았더니 지윤성! 내 눈엔 이 두 배우 분이 왜 이렇게 닮아 보일까? 

* 한인수 배우의 목소리와 발음이 어찌나 좋은지 귀에 쏙쏙 들어온다. 이 분하면 MBC 조선왕조 500년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대왕 역할을 하셨던 게 퍼뜩 떠오른다. 미소가 정말 인자했었다.



2023-10-07

초록빛 모자 - MBC 베스트셀러극장 (서갑숙 박영규)


포탈에서 검색해보면 리뷰가 여러 편 나온다. 베스트셀러극장 중에 기억하는 분이 꽤 많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개인적으로는 여자 주인공이 '남장'을 하는 게 너무 강렬했어서 기억에 짙게 남았다. 여자가 얼굴에 수염을 그리고 누가 봐도 큰 남자 양복을 입는 게 몹시도 신기했었다. 여기에 두꺼운 뿔테 안경까지 곁들인 서갑숙은 내 눈에 정말 남자 같았다. 그 생경함이 단막극 끝나갈 때까지도 극복이 되지 않았다.


MBC 베스트셀러극장 초록빛 모자. 출처 월간 조선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54회 초록빛 모자


: 1985년 1월 6일 방영. 김채원 원작. 서갑숙, 박영규 주연



스틸 사진을 보니 박영규가 초록색 모자를 쓰고 있는데 내 기억 속엔 색깔 정보가 없다. 왜냐면 당시 우리집 TV가 흑백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막극 제목과 내용이 나에게는 따로 노는 느낌이다. 초록빛 모자로 대변되는 박영규는, 마음을 닫아걸고 자신을 부정했던 주인공이 스스로를 되찾게 만드는 '희망' 같은 존재인데 그 중요한 상징을 놓치고 봤으니...

이 단막극이 더 인상에 남은 이유는 당시 내가 살았던 동네에서 촬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사는 집은 성신여대 근처에 있었다.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면 한참 쳐다보곤 했다. 개천 다리도 나왔던 것 같은데 동네 낯익은 곳이 화면에 나오면 탄성을 지르며 아는 척을 했었다. 비록 촬영하는 건 못 보았지만, 만약 당시에 직접 보았다면 아마 굉장한 추억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원래 추억의 드라마 리뷰를 쓸 때는 다른 리뷰를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번엔 서갑숙 배우의 인터뷰 기사까지 보고 말았다.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혼자 꾹꾹 억누르며 그만큼 더 외로워졌던 주인공. 마지막에 용기를 낸 그녀는 결국 행복해졌을까? 




샴푸의 요정 - MBC 베스트셀러극장 (채시라 홍학표)


요즘 말로 나의 최애캐(최고로 애정하는 캐릭터)와 사귀어보는 상상,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그 판타지가 잘 그려진 드라마들이 있는데 '샴푸의 요정'은 그 원조라고 할 수 있겠다. 최고 인기 스타를 상대로 혼자 사랑을 키우는 주인공. 과연 스타의 연인이 되는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광고 화면 속의 채시라
'샴푸의 요정' 애리 역의 채시라. 해피타임 캡쳐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226회 샴푸의 요정

: 1988.11.06 방영. 장정일 시 원작. 주찬옥 극본. 황인뢰 연출. 채시라, 홍학표, 윤석화, 이효정, 이홍렬, 오영수 출연.

샴푸 모델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애리(채시라)를 만나기 위해 주인공 현재(홍학표)가 한 일은 광고회사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여기서 잠깐. 굵직한 광고를 만드는 광고회사라면 들어가고 싶다 해서 맘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 현재의 스펙이 좋은가? 어쨌거나 그는 소원대로 애리를 만나게 되고, 스토커한테 시달리는 애리의 흑기사가 된다.



이 당시 채시라 배우는 가나초콜릿 광고 모델로 각인된 상태였다. 채시라 하면 곧 가나초콜릿이었다. 순수하면서도 나이 답지 않게 분위기 있어 보이는 외모가 진한 초콜릿과 잘 어울렸다. 이런 청순한 하이틴 스타 이미지를 뒤엎고 성인 배우로 발을 내디딘 게 '샴푸의 요정'이었다. 방영한 지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이 화가 회자되는 거 보면 채시라의 연기 인생에 있어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배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광고 얘기를 좀 더 해보자면, 채시라 하면 떠오르는 광고들이 더 있다.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 카피가 주옥같았던 베스티벨리, 너무 슬프게 펑펑 울다가 티슈를 뽑아 눈물을 닦던 크리넥스, 물을 맞으며 춤을 추는 모습이 기가 막히게 섹시했던 해조미인(맞나?) 광고 등. 해조미인 광고는 광고의 신 김규환 감독이 만든 것으로 아는데 영상이 왜 없을까?


KBS2TV <쇼 토요특급> 빛과 소금 - 샴푸의 요정 (1990년 07월)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 수많은 단막극 중에서도 이 화가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은 같은 제목의 주제가 덕분이기도 하다. 시티팝의 선구자 '빛과 소금'이 만든 샴푸의 요정은 지금 들어도 정말 좋다. 세련된 멜로디와 부드러운 초콜릿 같은 장기호의 목소리. 노래를 듣고 있으면 정말 어디선가 샴푸 향기가 날 것만 같다.

TXT(투모로우바이투게더)라는 아이돌 그룹이 리메이크한 버전도 있다. 이 노래에 춤이라니 문화 충격이...!  😅

[TOMORROW X TOGETHER COMEBACKSHOW] TXT - Fairy of Shampoo


- 별은 멀리서 봐야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나도 소싯적에 덕질 꽤나 했는데 스타에게 너무 가까이 가면 못 볼 꼴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금은 에너지가 달려서 어렸을 때처럼 하래도 못 하지만, 어떤 관계이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스타라면 밤하늘에서 빛나는 모습만 보고 싶고 기억하고 싶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2023-10-06

인간의 꽃 - MBC 베스트셀러극장 (이기선 박영규)


단막극의 주 무대는 3층 정도의 저택. 거실이 엄청 넓었으며, 배우 이기선이 나왔다. 누군가 저택에서 추락하는 장면이 있었고, 제목 표기가 '◯◯의 花'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배우 이기선이 한복을 입고 머리에 쪽을 졌다
배우 이기선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96회 "인간의 꽃"


: 1985년 12월 8일 방영. 박완서 원작. 박철수 연출. 이기선, 박영규, 임미미, 박병훈 출연.


베스트셀러극장 목록을 찾아보니 눈길이 가는 제목이 있었다. 출연진에 이기선이 포함되어 있으니 내가 찾는 화가 맞는 듯했다. 영상은 없어서 원작 소설을 찾아보았다. 원제가 '욕망의 응달'. 품절 내지 절판 상태라 중고책을 사서 보았다. 처음 발간된 것이 1979년. 읽는 동안 이 소설이 정말 40여 년 전에 쓰인 게 맞는지 감탄하면서 보았다. 인간 내면을 눈으로 직접 보는 것마냥 날카로운 심리 묘사가 끝내주는 작품이었다. (역시 박완서 대작가님)


- 줄거리가 나옵니다. 스포일러 주의해주세요 -



미혼모인 자명은 옷가게를 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어느날 가게를 드나들던 젊은 남자에게서 청혼을 받는데 알고 보니 그는 동네 저택에 살고 있는 민우였다. 아이의 호적이 문제였던 자명은 민우를 따라 저택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민우의 가족들이 이상하다. 이름이 소희인 시어머니는 자명보다도 젊고, 민우의 아홉 형제는 엄마가 다 다르다. 소희만 찾아대는 시아버지는 산 송장이나 다름없다. 사실 민우가 자식 있는 자명에게 접근한 것은 다 속셈이 있어서였다.

민우와 가장 친하면서도 친하다고 할 수 없는 누나 영우가 저택 비상구 아래쪽에서 떨어져 죽은 채로 발견된다. 전날 밤 잠을 못 자고 있던 자명은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다고 밝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 자명이 본 대로라면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소희이다. 자명의 말을 믿지 않았던 민우도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생각이 바뀐다.

영우의 장례가 치뤄지고, 서자 중에 첫째인 태우는 저택을 나섰다가 죽임을 당할 뻔한다. 그는 처음부터 소희를 믿지 않고 늘 각을 세웠다. 자명의 얘기를 듣고 영우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타살이라고 확신하던 중이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인간을 잡고 보니 저택의 정원사였다. 아울러 소희에 대해 뒷조사한 내용까지 전해 들으니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소희는 태우의 아버지가 망하게 한 집안의 딸이었던 것. 정원사는 소희의 친척으로 그녀의 복수를 도와주기 위해 함께 했던 것이었다.




한편 민우는 자명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과 그 이유를 낱낱이 밝히고 용서를 구한다. 시작이야 어찌 됐건 정말 사랑하게 된 두 사람은 함께 하기로 한다. 모든 전말이 들통날 위기에 처하자 소희는 3층에 불을 지른다. 한데 자명이 불길 속에 뛰어들자 소희도 뛰어든다. 자명이 끌고 나온 시아버지는 알고 보니 이미 죽은 지 한참 된 상태였다. 소희는 잿더미 속에서 발견되고, 민우는 살아남은 자명에게서 인간미를 느낀다.

🌹 🌹 🌹

주인공 자명을 이기선님으로 상상하며 소설을 읽었다. 자명과 이미지가 정말 잘 어울린다고 혼자 감탄 아닌 감탄을 했었는데 딱 하나 나오는 인간의 꽃 리뷰를 보니 악역이었다고?? 그럼 소희 역을 하셨던 것인가?! 생각해보니 가슴에 칼을 품은 채 천사표 연기를 하는 역에도 잘 어울렸겠다 싶다. 남자 주인공은 생각도 안 나고 오로지 이기선님만 생각나니 어릴 적 내가 정말 왕팬이긴 했나 보다.

극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을씨년스럽고 미스터리하면서도 괴이한 느낌이었는데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말하는 눈 - MBC 베스트셀러극장 (정혜선 이기선)

위키백과의 베스트셀러극장 작품 목록을 정독했다. 그중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으니 '말하는 눈'. 출연자 명단에 배우 정혜선님도 들어있으니 틀림없다. 유레카!

 
정혜선이 어딘가를 올려다 보며 웃고 있다
배우 정혜선. 출처 여성동아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68회 '말하는 눈'

: 1985. 4. 21 방영. 박철수 연출. 정혜선, 이기선, 박영규, 김추련 출연. 

눈꺼풀을 빼고는 전신 마비 상태인 정혜선(극 중 이름을 모르는 관계로 배우 성함 사용. 존칭 생략). 어떻게 그런 상태가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서 지내는데 며느리(?)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러다 웬 남자(김추련 아니면 박영규)가 등장하는데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눈을 깜박인다. 남자는 그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대화를 시도한다. '예'는 한 번, '아니오'는 두 번 눈을 깜빡이라 정하고 글자판을 만들어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짚는다. 정혜선이 말하고 싶은 단어는 냉장고 냉동실에 숨겨져 있는 그것, 가스마스크.

며느리로 나왔던 배우가 어찌나 표독스러운지 정말 무서웠다. 배우가 누구인지 알쏭달쏭했는데 출연진 중에 '이기선' 이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어느 날 혜성 같이 나타나 MBC 드라마에 연이어 나왔던 배우. 어릴 적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시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안 보여서 정말 섭섭했었는데... 악마로 기억하는 캐릭터가 이 분이 연기한 것이었다니.

이기선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배우 이기선. 출처 다음이미지

정혜선이 필사적으로 눈을 깜박이는 장면과 물이 가득한 욕조에 얼굴까지 잠기는 장면이 기억 속에 진하게 남아있다. 이기선이 방독면을 얼굴에 쓰고 집안에 가스를 틀었던 것 같은데 정작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정혜선을 도와주려고 했던 남자도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안 나고. 아, 궁금해.

원작자가 '마이클 해리슨'이라는 정보로 1990년대에 사망한 작가를 찾아내긴 했으나 대표작 중에 '말하는 눈'과 비슷해 보이는 제목이 없었다. 혹시나 영상이 유튜브에 있을까 기대를 해보았지만 없다.......

어렸을 때 정말 숨죽이며 봤었는데, 진심으로 다시 보고 싶다.



월광 - MBC 베스트셀러극장 (김인문 김해숙 심양홍)

이 단막극을 기억하는 건 살구색이 난무하는(?) 장면 때문이다. 달빛만이 살아있는 밤을 틈타 동네 외진 곳에서 만나는 두 남녀. 옷을 벗어던지고 살을 비비는데 그 장면이 당시엔 그렇게 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내용은 다 까먹고 오로지 이 장면만 머릿속에 남아있었으나 배우들이 누군지 알고 있어서 제목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왼쪽부터 고 김인문, 김해숙, 심양홍
왼쪽부터 고 김인문, 김해숙, 심양홍. 출처 티비리포트/오마이뉴스/SBS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 118회 '월광'


: 1986. 6. 15 방영. 오유권 원작. 고 김인문, 김해숙, 심양홍, 박은수 출연.

원작은 오유권 작가의 소설 '월광'. 이 작가분은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데 우리말 큰사전을 세번씩이나 필사하면서 혼자 공부하셨다고 한다. 남긴 작품이 수백 편이고 그중 1백 여 편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 쓰신 거라고 한다. 우리나라 소설을 꽤나 읽었다고 자부하지만 솔직히 낯선 이름이다. 유튜브에 낭독판이 있어서 들어보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나 김유정의 '봄봄'이 생각날 만큼 토속적이다. 어찌 이런 작가를 모르고 살았을까?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 스포일러 주의! -



줄거리는 이렇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그리고 두 아이가 한 집 한 방에서 같이 산다. 아들이자 남편은 좌익 사람들을 고발하는 일을 하다가 산속으로 도망친 건지 잡혀간 건지 죽은 건지 소식이 없다. 매일 밤 며느리가 소변보러 나갈 때마다 그 소리에 깨서는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르던 진 노인은 어느 날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며느리를 따라나선다.

불길한 예감은 잘 들어맞는다고 며느리는 동네의 사내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으슥한 보리밭에서 뼈와 살이 타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는 사내를 진 노인은 불러 세운다. 놀랍게도 주먹을 날리는 대신 며느리에게 다시 가보라고 하는데...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한 진 노인은 며느리가 새로운 짝을 만나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하필 그때 어둠 저편에서 나타난 사람은 바로바로바로 아들...! 허허, 이 죽일 놈의 타이밍 어쩌란 말인가.


* 유튜브에 찾아보니 KBS에서 만든 단막극이 올려져 있다. 변희봉, 권재희 주연. 재미있어 보인다. (2023.09.18 변희봉 배우 타계)

* 이 단막극에서 심양홍 배우를 처음 봤는데 너무나 동네 아저씨 느낌이라 배우가 아닌 줄 알았다; 이후로 일요 아침 드라마 '한지붕 세 가족'에 등장. 찾아보니 국문학 전공이신데 왜 전직이 음대 교수였다는 헛소문이 났던 걸까?

* 비록 머릿속에 남은 것은 19금 장면 뿐이었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알게 되었다. 사전 필사 얘기를 들으니 고 김소진 작가가 떠오른다. 이 분도 사전을 통째로 옮겨 적었다고 한다. 순수문학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소설들을 썼었는데 안타깝게도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2023-10-05

인형의 교실 - MBC 베스트셀러극장 (김혜수)

지금은 누구나 알아주는 배우가 된 김혜수. 고등학생 때 데뷔했지만 너무나 성숙한 외모를 가졌기에 주로(거의) 성인 역할을 했다. '인형의 교실'에서 선생님으로 나왔을 때가 우리나라 나이로 17살. 도무지 제 나이로 보이지 않는 외모에 감탄하며 이 단막극을 보았었다.

김혜수가 꽃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인형의 교실'에서 선생님으로 나온 김혜수. 유튜브 캡쳐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133회 인형의 교실


: 1986. 10. 19 방영. 오탁번 원작. 장선우 연출. 김혜수 주연.

외진 곳의 초등학교에 새로운 선생님이 온다. 그런데 선생님의 물건이 자꾸 없어진다. 아이들도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극 전반에 흐른다. 선생님의 물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알고 보니 선생님이 갑자기 떠날까봐 아이들이 숨겨놓은 것. 물건을 찾느라 선생님이 떠나는 게 지체될 수도 있고, 남은 물건은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으니.......

긴 생머리에 하얀 블라우스 였나 흰색 윗옷을 입은 김혜수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새가 지저귀듯 가늘고 톤이 높은 목소리도 참 상큼했었는데. (훗날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혹시 유튜브에 있나 하고 찾아봤더니 있다! 화질은 안습이지만 볼 수 있는 게 어디여~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보실 분은 있을 때 보세요)

MBC도 KBS처럼 베스트셀러극장 고화질로 복원해서 특집으로 방영해주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