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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3

골패 - KBS TV문학관 (백수련 반효정 조용원 남일우)


대학생 은영(조용원)의 집에 할머니(백수련)가 돌아온다. 할머니는 몇 년 동안 미국에 있는 큰딸(김진애) 집에서 지냈다. 원래는 한국의 장남(남일우) 집에서 살았었는데, 미국 영주권을 받아 가족을 초청해달라는 며느리(반효정)의 설득에 마지못해 간 것이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제사를 잘 챙기겠다고 약속해놓고는 돌아온 할머니[시어머니]에게는 자신의 종교 때문에 지낼 수 없었다며 딴소리를 한다. 

KBS TV문학관 골패에 나온 백수련과 조용원
KBS TV문학관 '골패' 백수련과 조용원

KBS TV문학관 제168화 골패


: 1985. 02.09 방영. 정건영 원작. 박병우 극본. 박진수 연출. 백수련, 반효정, 조용원, 남일우, 박혜숙, 김진애, 손창민, 곽경환, 나정옥, 박정웅, 이수연, 김영배, 김주호 출연.




한 달 간 와있기로 한 할머니는 은영의 방에서 지낸다. 할머니는 분신 같은 골패를 꺼내 짝을 맞추며 혼자 웃고 떠든다. 은영의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귀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 마냥 기괴해 보인다. 은영은 할머니와 가까이 지내면서 할아버지가 얼마나 처참하게 돌아가셨는지 알게 된다.

할머니는 노인정 사람들을 불러다 잔치를 벌이며 미국 생활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자랑을 늘어놓는다. 노인들은 할머니가 주는 외국 과자와 초콜릿을 먹으며 들떠하지만 사실 이것들은 한국의 동묘시장에서 산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누군가가 '진짜 미제구만' 한 소리에 '그럼 가짜냐'며 몹시 발끈한다. 집에 돌아와서는 노인들 욕을 마구 늘어놓다가 깡소주를 들이붓고는 돌연 며느리에게 소리친다. 미국에서 사람 대접은커녕 가정부로 부려 먹었다고. 며느리를 큰딸로 착각한 할머니는 그야말로 미친 사람처럼 울분을 쏟아낸다. 며느리는 은영에게 (아버지한테)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시킨다.



전보를 몇 번 씩 보내도 반응이 없었던 작은딸은 할머니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겨우 찾아온다. 작은딸은 오빠 부부와 엄마에게 감정이 많았다. 자신이 번 돈으로 오빠의 대학 학비까지 보태줬지만 오빠 부부는 할머니 재산을 다 가져버렸다. 할머니는 너희들이 원하면 안 가겠다며 지옥 같은 미국 생활에 대해 털어놓지만 할머니를 붙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영은 풀이 죽어있는 할머니에게 골패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할머니는 손녀에게 골패를 주겠다고 한다. 은영은 할머니에게 골패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기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유산으로 물려받겠다고 한다.

출국하는 날, 할머니는 갖고 있던 보석 중 유일하게 진짜인 목걸이를 며느리에게 걸어준다. 출발 직전 며느리가 달려 나오지만 할머니를 붙잡는 게 아니라 할머니에게 이름표를 걸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할머니는 떠나고, 은영은 방을 둘러보며 할머니의 빈 자리를 느끼다가 책상 위에 골패가 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며칠 후, 전화 한 통이 걸려 오는데.......



🎲 🎲 🎲

아주 어렸을 때 보았으나 몇몇 장면들이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특히 할머니를 박대하던 모습들. 마침 KBS 유튜브 채널에 올려져 있어서 다시 보니 작은 딸의 냉담함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며느리가 악역을 도맡고 있지만, 그렇다고 부인의 행동에 이렇다 할 행동도 취하지 않는 장남이 더 문제라는 생각도 든다. 짧은 내용에 세대 갈등, 고부(시어머니와 며느리) 갈등, 종교 갈등, 가족 간의 갈등이 한데 뒤섞여 담겨 있다. 그뿐만 아니라 1980년대에 불었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허상 꼬집기까지. 만약 KBS UHD TV문학관 시리즈가 또 기획 된다면 이 작품도 꼭 넣어주시면 좋겠다.


손창민과 조용원이 길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KBS TV문학관 '골패' 손창민과 조용원

* 은영의 친구로 나오는 미남 배우는 손창민! 
* 할머니로 나온 백수련 배우는 며느리와 아들로 나온 반효정, 이일우 배우보다 젊다. 
* 장남 가족이 사는 저택은 TV문학관 젊은 느티나무에 나온 곳과 같아 보인다.
* 후반에 롱테이크(long take) 연출이 인상적이다.



2023-10-10

곰팡이꽃 - KBS TV 문학관 (남궁민 주연)


자신이 사는 아파트의 어느 주민이 버렸을 쓰레기봉투를 몰래 가져와 욕실에서 해체해보는 남자. 범죄를 수사하는 형사나 할법한 일이 이 남자에게는 취미이자 중요한 일상이다. 누군가에 대해 알고 싶거든 그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지만, 버리는 쓰레기를 보아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내 이웃이 버린 쓰레기를 탐하라. 이 남자는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곰팡이꽃-쓰레기를 뒤지는 남자
KBS TV문학관 곰팡이꽃. 출처 한겨레

KBS TV 문학관 '곰팡이꽃'

: 2003.12.28 (일) 방영. 하성란 원작. 김형일 연출. 남궁민, 박현숙, 이두일, 이얼 출연.


원작은 1999년에 발표된 하성란의 소설이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의 옆집 여자와 그 애인의 얘기가 주로 나오는데, 당시 신문기사(소설이 기술을 만났을 때 - 한겨레 2003.12.25)를 보니 TV문학관에서는 각색이 많이 되었다. 이 단막극만 보고 소설 읽은 척을 하면 절대로 안된다. 본 지 너무 오래되었지만 주인공 남궁민이 쓰레기를 욕조에 펼쳐 놓고 분석하던 장면 만큼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꼭 이 드라마 때문은 아니지만 우편물이나 고지서 따위를 버릴 때 개인 정보가 적혀있는 부분은 철저히 제거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택배 받는 게 일상이 된 뒤로는 송장 없애는 데에 정성을 들인다. 누가 내 쓰레기를 뒤져서 이름과 주소 등을 알아낸다면?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지 않는가~





소설 속 남자는 쓰레기에서 알게 되는 것들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쓰레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옆집 여자의 애인은 여자가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 집 쓰레기에선 과일만 빼먹은 케이크가 나온다. 주인공 남자가 보기에 그 애인은 여자의 진심을 알지 못한다. 다른 누군가의 '진짜 진심'과 '진짜 진실'을 알고 싶은 남자의 심리가 쓰레기를 파헤치게 만든다. 그 애인이 여자의 쓰레기를 봤다면 여자가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럼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살면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그런 사람 모두와 친분을 맺을 수는 없다. 갑자기 다가가 내 안에 너 있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무작정 나와 친구 하자고 조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사람에 대해 알고는 싶은데 친분을 맺을 순 없으니 관음 하는(엿보는) 방식으로 그 사람의 쓰레기를 탐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말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다면 부딪혀 봐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보기 좋게 거절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No Pain No Gain. 거절이 두렵고 무서워서 시도하지 않으면 얻어지는 것도 없다. (단, 거절 당하는 것을 못 견뎌서 복수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사람은 아예 시도도 하지 말기를)




남의 쓰레기를 뒤져보고 잘 치우기만 한다면, 딱 거기까지만 한다면 따로 누구에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뭐 어떤가 싶은 생각도 들긴 한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이 쓰레기도 사생활 영역인가? 누군가의 집 안에 있는 쓰레기를 뒤진다면야 그렇겠지만 쓰레기장에서 익명성을 얻은 쓰레기는? 주인의 손을 떠나버린, 말 그대로 버려진 쓰레기를 소유하는 것은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듯한데... 남의 쓰레기를 가져다 분석하는 것을 좋게 볼 수 없는 이유는 우선 방식이 지저분하고(dirty), 누군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자 하는 그 '악착같음'이 소름 돋기 때문일 것이다.

* 위에 링크한 기사에 따르면, 당시 이 한편에 3억을 들여서 만들었다는데 왜 KBS 홈페이지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을까? 더구나 고화질 HDTV 16:9 화면에 5.1 채널 입체 음향으로 제작했다는데 왜 다시보기가 없을까?




2023-10-06

산노을 - KBS TV문학관 (이기선 이구순)

문제 있는 형 부부를 대신해 조카를 챙겨 고향으로 내려온 동석(이구순)은 마을에 요양하러 와있던 하영(이기선)과 만나게 된다. 조카가 다친 것을 계기로 가까워지는 두 사람. 하지만 하영에게는 문제가 있었으니.......


풀밭에 앉아있는 이기선과 이구순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KBS TV문학관 산노을. 유튜브 캡쳐


KBS TV문학관 제63회 산노을


: 1982.11.06 방영. 이철향 극본. 맹만재 연출. 이기선, 이구순, 서승현, 정재순, 최정훈, 반문섭, 최성우 등 출연.


순전히 이기선 님이 나온다고 해서 봤으나... 솔직히 추천을 못 하겠다.

배경으로 나오는 양떼 목장 풍경은 아주 좋다. 화면만 보면 눈과 마음이 편안해지지만 스토리는 저혈압 환자도 치유시키는 저세상 전개!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아니 20대 젊디 젊은 딸이 시한부 선고받았는데 딸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해주고 병원비 감당할 수 있는 남자와 결혼을 하라고 압박하는 엄마라니 이게 대체 무슨? 딸의 남자 친구한테도 설명은커녕 무조건 만나지 마라 안된다 그러면 누가 대뜸 '넵 그러겠습니다' 하겠냐고요~ 이야기 전개를 위해 하영의 엄마가 침묵하는 설정이 필요했겠지만, 갈등이 너무 억지스러워서 보는 내내 짜증이 났다.

게다가 하영은 중환자나 다름 없는데 뜬금없이 봉사를 하겠다고 수녀원에 가는 것도 참.... 주인공이 이런 선택을 할 수도 있는 캐릭터라는 게 이야기 안에 어우러지면서 보여졌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나 암시 없이 갑자기 그러니 시청자 입장에선 황당할 뿐이었다.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이기선
KBS TV문학관 산노을. 유튜브 캡쳐


내용 얘기는 여기까지. 이기선 배우만 보겠다 하면 보세요. 젊은 시절의 이구순 배우 보고 싶다 하면 보세요. 그 외에는........


* KBS 옛날티비 유튜브 채널 영상에 두 배우가 결혼했다고 써놓은 댓글들이 있는데 그랬으면 인터넷에 기사 한 줄 없을 리가 없다. 검색을 해보니 두 분 다 외국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부부라는 얘기는 일체 없다.




2023-08-08

젊은 느티나무 - KBS TV문학관 (김혜수 이효정 정보석)


엄마(태현실)가 재혼하면서 새 아빠(김세윤) 집으로 오게 된 숙희(김혜수). 그 전까지는 할머니(김소원), 할아버지(김순철)와 시골에서 살고 있었다. 서울 집에는 의붓오빠 현규(이효정)가 있었다. 숙희는 그에게 점점 이성적인 감정을 품게 되고, 그를 오빠라고 불러야 하는 게 고통스러워진다.

숙희가 현규의 자전거 뒷자리에 타고 있다
TV문학관 젊은 느티나무. 김혜수, 이효정.

UHD로 만나는 KBS TV문학관 "젊은 느티나무"

: 제238화. 1986.11.29 방영. 2023.08.07 재방영. 강신재 원작. 김하림 극본. 김재현 연출.
김혜수, 이효정, 정보석, 김세윤, 태현실, 김순철, 김소원, 박용식, 유순철, 최용욱, 김만용, 김수정, 장은정 출연.

그 와중에 현규의 친구 지수(정보석)가 러브레터를 보내온다. 현규는 숙희가 흘린 편지를 읽고 몹시 화를 낸다. 숙희는 현규의 이런 반응이 그 또한 자신과 같은 마음인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기쁘다.



두 사람은 함께 산책을 하고 서로를 안아본다. 결론이 안 나는 감정으로 괴로운 숙희에게 당황스러운 소식이 전해진다. 엄마가 새 아빠를 따라 미국에 가봐야 될 것 같다고 한 것이다. 현규와 한 집에서 단 둘이 지내는 게 감당이 안 됐던 숙희는 시골로 내려가 버린다. 그런 숙희에게 현규가 찾아온다. 엄마도 여행 경비가 필요할 테니 집은 빌려주고 따로 지내자고 한다. 그리고 우선은 각자 공부부터 마치고 방법을 찾아보자고 한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숙희는 속으로 되뇌인다. 나는 그를 더 생각해도 되는 것이다...... 

숙희가 느티나무를 안은 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KBS TV문학관 젊은 느티나무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소설은 몰라도 이 구절을 아는 분은 많을 것이다. 원작을 다시 읽어보다 1960년에 발표되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2023년 기준으로 쓰여진 지 60년이 넘었다니. 그럼에도 (심각한) 문어체를 빼고는 세월의 흐름을 느끼기가 어렵다. 그 시절이면 6.25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밖에 되지 않아 먹고 살기 아주 힘든 때인데 소설에서는 냉장고, 코카콜라, 주스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숙희와 현규는 테니스와 비슷한 정구를 즐긴다. 지수는 지프(Jeep)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 지금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누구나 외국을 갈 수 있지만, 80년대에만 해도 해외로 나가는 게 쉽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등장 인물들을 상류층으로 설정한 것이 작품을 회춘(?)시키고 있다.




숙희가 빨간색 옷차림으로 정구를 치고 있다
TV문학관 젊은 느티나무

TV문학관을 보니 소설을 거의 그대로 영상으로 옮겼다. 그 싱크로율에 깜짝 놀랄 정도다. 무엇보다 압권은 숙희 역의 김혜수이다. 청순한 외모에 늘씬한 체형은 무용을 하는 E여고 퀸(Queen) 숙희와 잘 어울린다. 정구를 칠 때 입는 빨간색 깔맞춤 의상은 강렬한 인상을 더해준다. 김혜수가 아닌 숙희를 상상하기 힘들다. 엄마 역의 태현실도 소설 속 엄마의 현신 같다. 엄친아 느낌의 정보석도 지수와 잘 어울린다. [사실 다시 보기 전까지 정보석이 오빠로 나온 줄 알았다. 기억의 왜곡이란. 효정님 죄송....]

알록달록 예쁘게 단풍이 든 산에서 숙희와 현규가 어울리는 장면은 영상미가 특히 뛰어나다. 숙희가 혼자서 갈등하는 장면들도 연출이 잘 되었다. 고화질로 복원된 TV문학관 '젊은 느티나무'를 많이들 보시면 좋겠다. 소설까지 함께 읽으면 더욱 재미있게 보실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그를 더 생각해도 되는 것이다...... 소설 원문은 '나는 그를 더 사랑해도 되는 것이다'이다. 드라마에서는 '사랑'을 '생각'으로 바꾸었다. 아무리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해도 법적인 남매 사이에서 사랑 운운하는 것을 공영 방송에서 내보내긴 힘들었을 것이다. 

* 숙희와 현규가 정구를 칠 때 웬 할아버지가 그물 옆에 서서 경기를 지켜보는데, 소설을 읽어보면 이 분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 느티나무의 꽃말이 '운명'이라고 한다.

2023-07-30

만다라 - KBS TV문학관 (서영진 반석진 박병호)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며 수행하던 법운 스님(서영진)은 하룻밤 쉬어가길 청한 절에서 지산 스님(반석진)을 만나게 된다. 지산은 밥 대신 술을 퍼 마시며 '내 부처는 소줏잔에 있다'는 쉰소리를 서슴없이 내뱉는 땡중이었다. 나무 관세음보살 대신 나무 소주불을 외는 그에게 주지스님(박용식)은 나가라 호통치고, 법운은 지산을 따라 동행 아닌 동행을 자처한다.


노을진 하늘을 배경으로 스님 두 명이 걸어가고 있다
KBS TV문학관 만다라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만다라"


: 제 214화. 1986.01.25 방영. 2023.07.31 재방영. 김성동 원작. 이환경 극본. 김재현 연출. 서영진, 반석진, 박병호, 박용식, 김현주, 최선아, 공경구, 박현정, 최용욱, 홍유진, 이형진, 이경영, 박진성, 장정희, 최건호, 고아라, 최용팔, 최용호 출연.


법운은 어떻게든 지산을 도와 같이 다니려고 한다. 하지만 지산은 과거에 한 여인(김현주)과 잠시 얽혔던 얘기를 선물처럼 들려주고는 작별을 고한다. 

법운에게는 풀어야 할 화두가 있었다. "병 속에 새가 있다. 병을 깨뜨리지 않고 새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 큰절을 찾아가 공부를 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다시 길을 떠난 법운은 우연히 지산과 재회하게 된다.




오랜만에 본 지산은 병색이 더 깊어져 있었다. 법운은 자신이 아는 절을 찾아가 지산과 머무를 수 있게 해달라고 사정하지만, 절에선 파계승을 받아줄 수 없다며 거절한다. 법운은 버려진 암자를 봐두었다며 지산에게 주지스님이 되어 달라고 한다. 두 사람은 추운 겨울 깊은 산 속 암자를 향해 길을 떠난다. 날이 저물자 지산은 술집에서 배를 채우고 가자고 한다. 그곳에서 지산은 처음 본 여자(방희)와 스스럼 없이 어울리고, 법운은 그런 지산에게 실망하며 혼자 암자로 떠나버린다. 

밤새 눈이 내리고, 다음날 법운은 눈을 치우다 뭔가를 발견한다. 그것은 꽁꽁 얼어버린 지산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 '고독의 끝, 번뇌의 끝, 욕망의 끝, 절망의 끝, 허무의 종점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던 지산. 법운은 통곡하다 그를 암자 안으로 옮기고 불을 지른다. 현재 상황에서 그가 지산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다비식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법운은 손에 쥐고 있던 차표를 찢는다. 그리고 어디론가 걸어가면서 드라마는 끝이 난다.




어렸을 때 분명 보긴 했는데, 희한하게도 중간에 짧게 나온 박진성 배우만 기억이 난다. 손가락 공양하는 장면 때문일까? 만다라 하면 전무송, 안성기 주연의 영화가 더 먼저 떠오르긴 한다. 얼어 죽은 지산의 모습이 너무 리얼했던. 

나이 들어서 다시 보니(처음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선문답 같은 얘기들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절망의 중심에 있으면서 1mm쯤 가능성이 있다고 착각하는 게 불쌍한 중생들'이라든지 '그놈의 희망 때문에 절망부터 깨달아 버렸다'라든지. '병 속의 새'는 계속 생각해보는데 정답이 없는 게 정답 같다(정답이 과연 있을까 모르겠지만). 그냥 '나'라는 존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인간 같다는 생각만 든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게 깨달음이고 깨달음을 얻는 자가 바로 부처이니라"
"부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신은 결국 나 자신이 아닐까. 나는 나를 믿어야 한다,는 말을 새삼 되새겨 본다. 



* 법운 스님으로 나온 서영진 배우는 2006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 지산 스님으로 나온 반석진 배우의 딸도 배우이다. 반민정.
* 티비문학관 '만다라'를 보다 보면 라면과 막걸리가 먹고 싶어질 수도 있다.


2023-07-19

불 [Fire] - KBS TV문학관 (조민수 김진태 백수련)


외진 산골에 사는 만보(김진태)는 소를 팔러 장에 가다가 아랫마을 아저씨(박용식)를 만나게 된다. 소값을 제대로 받아 기분이 좋은 만보에게 아저씨가 용건을 꺼낸다. 형 부부가 죽어서 조카 넷을 떠맡게 되었는데 그중 순이(조민수)를 신부로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순이가 벽에 기대어 서럽게 울고 있다
TV문학관 '불'에서 순이로 나온 조민수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불"


: 제213화. 1986.01.18 방영. 2023.07.24 재방영. 현진건 원작. 이홍구 극본. 김재순 연출. 조민수, 김진태, 백수련, 민지환, 전원주, 박용식, 홍영자, 김동완, 박건식, 김상락, 김종구, 김영기, 이계영, 차철순, 최건호 출연.


고리채를 빌려준 황주사(김동완)가 순이를 탐내고 있다며, 만보가 갖고 있는 200원이라면 빚을 겨우 갚을 수도 있겠다고 한다. 노총각이었던 만보는 고민하다 순이를 데려가기로 한다. 철 모르는 10대 소녀 순이는 졸지에 만보와 혼인을 하고 그의 집에 가게 된다. 



만보의 모친(백수련)은 소 판 돈으로 밭을 살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한데 아들이 그 돈으로 여자를 데려오자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대신 소 한 마리 몫을 해야 한다고 순이에게 바로 집안일을 시킨다. 밥이나 겨우 할 줄 알았던 순이는 동네 아주머니(홍영자)의 도움으로 시어머니가 시킨 일들을 해낸다. 

낮에는 시어머니가 가만 두지 않고 밤에는 짐승 같은 만보가 가만 두지 않는다. 순이의 삶은 곧 지옥이 된다. 헛간이나 부엌에서 잠들어도 깨어나 보면 만보가 눈앞에 있다. 부부가 지내는 방은 순이에게 공포 그 자체가 된다. 

한편 황주사는 장포수(민지환)에게 사람[만보]을 사냥해달라고 의뢰한다. 포수는 순이와 만보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본다. 하루는 순이가 만보의 새참을 챙겨주고 오는 길에 총소리에 놀라 넘어지면서 그릇들이 다 깨진다. 기분 나쁜 포수를 피해 급히 자리를 뜨던 순이는 신발을 한 짝 흘린다. 박살난 그릇 때문에 화가 잔뜩 난 시어머니는 포수가 신발을 던져 놓고 가자 순이가 그와 어울렸다고 오해하고는 모질게 회초리질을 한다. 순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몰래 집을 나간다. 하지만 만보에게 금방 다시 잡혀 온다. 시어머니는 순이를 방에 가두고 며칠간 밥을 굶겼다가 살살 달랜다. 순이는 방에 얼른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만보를 보고 다시 집을 뛰쳐 나간다.




굶주린 상태로 눈 덮인 산을 헤매고 다니니 순이의 꼴이 말이 아니다. 쓰러진 순이 앞에 포수가 나타나 먹을 것을 던져준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순이에게 포수는 더 잘 살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꼬드긴다. 하지만 순이가 말을 듣지 않자 강제로 끌고 간다. 그런 두 사람 앞에 만보가 나타나고, 포수는 그에게 총을 겨눈다. 두 남자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순이가 포수의 다리를 물어 뜯는데, 순간 총이 발사되고 만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포수는 도망가고 순이는 죽어가는 만보를 보며 오열한다. 이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이게 다 그 방 때문이라고. 순이의 얼굴 위로 활활 불타는 방이 겹쳐지면서 드라마는 끝이 난다. [*UHD 복원판에서는 화재 장면이 길게 나오고 순이와 만보의 대화가 추가되었다]

원작 소설과 드라마의 결말이 많이 다른 것 같아 다시 읽어보니, 각색을 해도 너무 심하게 해놓았다. 고리대금업자와 사냥꾼은 원작에 없다. 만보가 무자비하게 성욕을 풀어대는 '원수의 방'에 순이가 직접 불을 지르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인데, 어찌 이 부분을 (가상 인물까지 등장시켜) 바꿔 놓았는지 안타깝다. 만보의 존재가 사라진 뒤에 그 방을 태워 없앤다? 물론 화풀이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원작의 캐릭터가 훼손되어 버렸다.




자신이 왜 그런 처지가 되었는지 근본적인,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고 애먼 방을 탓하는 순이. 그 방이 없어져서 순이의 인생이 나아진다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없어지길 바라겠지만, 그게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순이가 더욱 더 불쌍할 뿐이다. 

🔥 🔥 🔥

이 '불' 또한 초반부터 고구마를 통째로 삼킨 듯한 속터짐을 선사한다. 혹독함이 느껴지는 겨울 풍경과 앳된 조민수 배우의 연기를 보는 맛이 있지만, 망가진 결말 때문에 자신있게 추천은 못하겠다. 대신 표현이 아주 리얼한 현진건의 원작 소설을 추천한다. 



2023-07-16

아네모네 마담 - KBS TV문학관 (정영숙 홍요섭 김보미)


밤 아홉시만 되면 아네모네 찻집에 나타나는 어느 대학생. 그는 늘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틀어 달라 신청하고는 마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가버린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마담과 대학생이 손을 맞잡고 있다
KBS TV문학관 아네모네 마담. 예고편 캡처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아네모네 마담"


: 제 205화. 1985.11.16 방영. 2023.07.16 재방영. 주요섭 원작, 박병우 극본. 이윤선 연출.
정영숙, 홍요섭, 김보미, 김진애, 김종결, 양재성, 김진태, 권성덕, 황범식, 반석진, 김기복, 이원발, 강양례, 홍순석, 유영희, 고아라 출연.





아네모네 다방을 운영하는 영숙(정영숙)은 매일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대학생(홍요섭)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는 영숙을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마담은 점점 그 이름 모를 대학생에게 마음이 기운다. 그가 고백해오기 만을 기다리며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친다. 영업이 끝나고 텅 빈 다방에서 그가 늘 앉는 자리를 맴돌며 사랑을 고백하기도 한다. 

옷에 신경을 쓰고 평소에 안 하던 귀걸이까지 하는 영숙을 보며 너도나도 한마디씩 한다. 영숙은 그에게 귀걸이로 멋을 낸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대학생은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발길을 뚝 끊는다.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영숙은 그저 속이 탈 뿐이다. 

그렇게 답답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 대학생이 돌연 낮에 찾아온다. 영숙은 그를 위해 미완성 교향곡을 틀어준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큰소리를 내더니 전축에서 레코드 판을 꺼내 사정 없이 부숴버린다. 일행인 친구(김기복)가 그를 다급히 데리고 나간다. 

그날 저녁, 대학생의 친구가 찾아와 자초지종을 말해준다. 사실을 알게 된 영숙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짧지만 달콤했던 꿈에서 깨어난다.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자세히 쓰지 않았다. 이왕이면 드라마를 직접 보시길 바란다. 마담이 대학생을 예술가로 상상하는 장면이 유독 재미있다. 주 줄거리 외에 다방 단골 예술가들의 얘기도 쏠쏠한 재미를 준다. 무용가(김진애), 시인(김진태), 화가(김종결), 소설가(양재성), 영화감독(권성덕), 배우...... 일제 강점기 시대의 인물이 실명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대사도 시적인 표현이 많다. 여러모로 추천!

아네모네의 꽃말이 여러가지인데 '괴로운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눈에 띈다. 영숙의 대사 중에 '우리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깊고 넓은 바다가 있어요' 이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마담이 대학생을 슬며시 바라보고 있다
KBS TV문학관 아네모네 마담. 마담 역의 정영숙




눈길 - KBS TV문학관 (안영주 민욱 염복순)


서울에서 바쁘게 살고 있는 경수(민욱)는 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오랜만에 시골에 내려간다. 1년에 한번 갈까 말까 한 그곳엔 어머니(안영주)가 있었다.


어머니가 아들을 눈으로 배웅하고 있다
KBS TV문학관 눈길. 웨이브 캡처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눈길"


: 제 115화. 1984.01.07 방영. 2023.07.03 재방영. 이청준 원작. 이은교 극본. 김재현 연출. 안영주, 민욱, 염복순, 남윤정, 신수강, 김인문, 반문섭, 이한승, 김상낙, 박현정, 안광진, 박상만, 전영미, 아역 권오현, 이종민, 박헌성 출연.


경수의 어머니는 아들과 둘째 며느리(염복순), 손자(이종민)를 몹시 반긴다. 경수는 어머니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목소리를 높인다. 이[치아]를 치료하라고 보낸 돈을 어머니가 생활비로 썼다고 하는 것이다. 경수는 생활비를 따로 챙겨드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큰 돈을 어디에 썼는지 아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제사 준비로 바쁜 집에 이장(김인문)이 찾아와 집 수리에 동참하라고 채근한다. 어머니는 아들이 들을 새라 그의 말을 끊는다. 솔직히 이 집에서 목돈이 나올 구멍은 경수 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에게 부담이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부터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큰 아들 용수(반문섭)가 도박에 미쳐 전 재산을 날린 탓이었다. 부인(남윤정)이 사경을 헤맬 때도 그는 도박판에 있었다. 화가 날 대로 난 어머니는 아들이 대문을 부술 듯 두들겨도 열어주지 않았다. 용수는 동네 움막 같은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경수는 동네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 어머니가 어디에 돈을 썼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술에 잔뜩 취해서는, 자신을 마중 나온 어머니에게 반복해서 얘기한다. "나는 어머니에게 빚진 거 없다"고. 어머니는 길을 되짚어 가며 아들이 흘린 신발을 찾아온다. 이를 본 경수의 부인은 어머니에게 냉정한 남편이 야속할 뿐이다.

사실 어머니는 아들이 준 돈으로 자신이 묻힐 땅[집터]과 수의, 꽃상여를 마련해 놓았다. 손자들은 언제 새집을 짓느냐고 묻는다. 어머니는 2층으로 집을 짓고 마당에는 잔디도 입힐 거라고 답해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환호하고 어머니는 혼자만 아는 웃음을 짓는다. 경수의 부인은 시어머니가 과거 얘기를 꺼내도록 자꾸 묻는다. 

어머니와 아들이 눈길을 걸어가고 있다
KBS TV문학관 눈길. 웨이브 캡처

다른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경수(권오현)가 급히 집에 온다. 텅 빈 방에는 경대 하나만 남아있다. 밤에 눈이 펑펑 내리고 어머니는 아들의 신발에 쌓인 눈을 턴다. 다음날,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던 어머니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버스 정류장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눈밭에 남아있는 두 사람의 발자국을 친구 삼아 돌아간다.

이때 집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하지만 새 주인에게 부탁해서 하룻밤 아들과 지낸 것이다. 경수도 집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고 달려온 것일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어머니는 담담히 회상한다. 다른 방에서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있던 경수는 눈물을 흘린다. 그간 형 대신 가장 노릇하며 어머니에게 냉정했던 자신에 대한 참회였다. 


* 줄거리를 써 놓고 보니 어찌 보면 평범하다. 소설에서는 아들이 어머니를 '노인'으로 지칭한다고 하니 감정의 골이 더 크게 그려지는 모양이다. 자식이라면 부모를 돌보는 게 도리이긴 하지만, 혼자 힘으로 출세해 오랜 세월 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식이라면 그 고단함과 고충에서 비롯되었을,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이해가 간다. 티브이 문학관 '눈길'은 아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새삼 느끼고 우는 것까지만 보여준다. '어머니 제가 앞으로는 자주 자주 뵈러 올 게요 부디 건강하세요' 따위의 대사는 이어지지 않는다. 절제 되고 깔끔한 연출이 돋보인다. 추천! 


2023-07-14

소리의 빛 - KBS TV문학관 (전무송 김성녀 김성겸)


예고를 보자마자 기시감에 시달렸다. 이거 아는 내용인데? 영화 서편제? 아니나 다를까, 같은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으니 내용이 거의 같을 수밖에.


TV문학관 소리의 빛. 전무송, 김성녀. 유튜브 캡처


UHD로 만나는 티브이문학관 '소리의 빛'


: 제100회. 1983.09.17 방영. 2023.06.26 재방영. 원작 이청준 연작소설 '남도소리'중 2편. 이희우 극본. 김홍종 연출. 전무송, 김성녀, 김성원, 김성겸, 조용원, 여운계, 이일웅, 아역 최호창, 김민희 등 출연.

=== 줄거리 나옵니다. 스포 주의하세요 ===

교도소에서 나온 한 사내(전무송). 선학동이라는 동네를 찾아가서 하룻밤 묵기를 청한다. 사내는 옛 생각에 젖는다.

사내(최호창)의 엄마는 아기를 낳고 죽었다. 아기의 아빠는 사내의 친아빠가 아니고 떠돌던 소리꾼(김성겸)이었다. 소리꾼은 사내의 집과 재산도 다 팔아버리고 엄마까지 죽게 만든 원수였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죽일 놈을 아버지로 여기며 살아가야 했다. 소리꾼은 사내가 목청이 좋다며 무조건 소리를 배워야 한다고 강요했다. '소리가 하늘에 닿으면 소리 속에서 학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학을 못 보았으니 네가 대신 봐야 한다'.


사내는 소리꾼이 자는 동안 그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엄마에 대한 복수심에 활활 불타오르다가도 소리꾼의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흔들렸다. 사내는 복수 대신 의붓아비와 배다른 여동생(김민희)에게서 도망쳤다.  

세월이 흐르고 사내는 전국을 돌며 부녀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듣게 된 소식은 거렁뱅이가 된 두 사람을 판소리 애호가 최부잣집에서 받아주었는데, 자신이 병든 것을 알게 된 소리꾼이 폐 끼치는 게 싫어서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때 여동생(조용원)은 이미 맹인이 된 상태였다.

사내는 주막의 남자 주인(김성원)에게 여자 소리꾼[여동생]에 대해 묻지만 주인은 모른다고 시치미를 뗀다. 그러자 사내는 여동생이 어떻게 맹인이 되었는지 말해준다. 소리꾼은 청강수[독약]를 얻어다가 자고 있는 딸의 눈에 떨어뜨렸다. 가슴에 한을 심어준다는 명목으로. 하지만 사내가 보기엔 딸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것일 뿐. 이 얘기를 들은 주인은 분개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다.  


또 세월이 흐르고 사내는 결국 맹인 여자 소리꾼(김성녀)을 만나게 되었다. 여자 소리꾼은 실어증 걸린 것처럼 목청을 닫아버린 상태였는데 사내에게는 거짓말처럼 소리를 들려준다. 사내는 여자에게 어릴 적 얘기만 꺼내고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사내가 간 뒤 여자는 다른 사람(이일웅)에게 말한다. 오래비가 다녀갔다고. 아는 체를 하지 않은 건 오래비 눈에 살기가 도는 것을 보아서라고 한다. 아비와 자신을 하나로 느껴서 이번에도 (살인 하기 전에) 도망가버린 것이라고. 사내는 담 뒤에서 여자의 얘기를 다 엿듣고는 그대로 떠나버린다.

급기야 사내는 주막 주인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며 위협한다. 그제야 주인은 얘기를 들려준다. 여자 소리꾼이 아비의 유골을 갖고 찾아왔었다고. 동네 어딘가에 몰래 묻고는 사라졌는데 그때부터 동네에 다시 학이 날아다닌다고. 얘기를 안 했던 건 여자 소리꾼이 신신당부를 해서였다고 한다. 누군가 자신을 찾으면, 자신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하기 전에는 절대로 얘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 주인에게서 얘기를 다 들은 사내는 정처 없이 발길을 옮긴다.......

TV문학관 소리의 빛. 김성겸, 조용원. 유튜브 캡처


이유야 어찌 됐든 아비가 딸의 눈을 멀게 만드는 부분은 소름이 돋다 못해 화가 뻗친다. 소설에서는 눈의 기운을 목으로 가게 해서 목소리를 좋게 만들려고 했다는 설명도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대체 그놈의 소리가 뭐라고. 사내가 어렸을 때부터 소리꾼에게 살의를 품은 게 너무나 이해가 간다. 더구나 여동생까지 장애인으로 만든 것을 알게 되었다면, 아무리 애증의 관계라고 해도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까지 더해질 것 같다.

복수하고 싶은 대상은 사라지고 만나고 싶은 대상도 사라지고 나이만 먹어버린 주인공의 인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오랜 세월에 걸쳐 켜켜이 쌓인 복잡다단한 감정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다 보고나니 고구마 백개는 삼킨 것 같지만 깊은 울림과 먹먹함을 주는 작품이다. 추천.
 


* 소리꾼으로 나온 김성겸 배우 하면 '하늘아 하늘아'에서 괴팍한 영조로 나왔던 게 잊혀지지 않는다. 사도세자로 나왔던 정보석이 어찌나 불쌍했던지. 혜경궁 홍씨 하희라도 그렇고. 여기서도 정말 욕 나오는 역으로...... (역사의 평가와는 별개로 드라마 속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 영화 서편제는 우리나라 영화 역사상 최초로 일백만명 넘는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다. 아직 안 보신 분은 티브이문학관과 비교해서 보는 것도 좋겠다.

* '소리의 빛'이 조용원 배우의 TV 데뷔작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보니 너무 반갑다.

TV문학관 소리의 빛. 조용원. 유튜브 캡처

백치 아다다 - KBS TV문학관 (김일란 김인문 장학수)


선천적으로 지능이 낮고 언어 장애를 가진 주인공 아다다(김일란). '확실'이라는 이름이 있는데도 아다다로 통한다. 무려 양반 신분인 김초시(이일웅)의 딸이지만 타고난 모자람 때문에 애들한테 놀림을 당하고 집에서도 구박받는다. 이 집에는 수롱(김인문)이라는 머슴이 있었는데 아다다와 서로 마음이 있는 사이였다.


아다다가 헛간에 숨어 울상을 짓고 있다
TV문학관 '백치 아다다'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아홉 번째 작품 "백치 아다다"


: 1983.06.11 방영. 2023.05.01 재방영. 계용묵 원작. 유열 극본. 주일청 연출. 김일란, 김인문, 장학수, 김난영, 이일웅, 여운계, 이치우, 남윤정, 곽정희, 전원주, 박용식, 이대로, 홍영자 등 출연.

=== 줄거리 나옵니다 스포 주의 ===

수롱은 혼자서 몇 사람 몫을 해내는 뛰어난 일꾼이긴 했지만, 김초시의 입장에선 딸의 짝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아다다를 며느리 삼으려 하는 집은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수롱과 맺어주려 하는데 일이 터진다. 만석(장학수)이라는 놈이 아다다를 좋아한다면서 강간을 해버린 것이다.  

만석의 아비(이치우)는 쫓겨날 것을 각오하고 김초시 집에 사과를 하러 온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이 집과 혼담이 오간다. 김초시는 천애고아 수롱보다는 부모라도 있는 만석을 사위 삼기로 결정한 것이다. 땅과 함께 시집간 아다다는 남편과 시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산다. 하지만 만석이 김초시로부터 받은 땅을 구리 광산에 투자하고 이게 대박이 나면서 아다다의 행복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돈맛을 알아버린 만석은 아다다를 천대하고 자꾸 친정에 가게 한다. 하지만 아다다의 부모는 죽어도 시댁에서 죽으라며 아다다를 내치기 일쑤다. 아다다는 시댁에서 유령처럼 숨어 살고 만석은 급기야 여자(남윤정)를 집에 데려온다. 친정에 있는 줄 알았던 아다다가 집에 있는 것을 본 만석은 죽일 듯이 아다다를 협박해서는 완전히 내쫓아버린다.

딸을 걱정하면서도 못 참아하던 아다다의 모친(김난영)은 아다다가 된장 항아리를 깨뜨리자 그간 쌓였던 분노가 터지면서 그녀를 마구 때린다. 집에서 도망쳐 나온 아다다는 차마 죽지 못하고 어느 집을 찾아간다. 거기엔 수롱이 혼자 살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동네를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여전히 아다다를 아끼는 수롱은 그녀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며 평생 모은 돈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다다는 돈이 생기자 무섭게 변해버린 만석이 떠오를 뿐이었다. 수롱이 고깃배를 사서 부자가 되면 만석처럼 되어버릴까봐 공포에 사로잡힌다. 전전긍긍하던 아다다는 수롱의 돈에 불을 지르고는 집을 뛰쳐나간다.
 
수롱이 집에 돌아왔을 땐 그의 전재산은 이미 재가 된 뒤였다. 그야말로 돌아버린 수롱은 아다다를 찾아서 그녀를 물속에 마구 처박는다. 대체 왜 그랬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다다는 영원히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망연자실한 수롱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바다를 향해 몸을 날린다. 아다다를 목놓아 부르면서. 
 

 
다 아는 내용이지만 다시 보고 나니 속이 터지다 못해 울분이 치솟는다. 핵고구마를 넘어서 핵폭탄 수준이다. 아다다가 원해서 장애를 가진 것도 아닌데 어떤 경우든 버팀목이 돼주어야 할 부모조차 딸을 외면하고, 결국은 아다다가 좋아했고 아다다를 진심으로 좋아한 수롱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게 너무나 비극적이다. 정작 중요한 것을 놔두고 허울과 명분을 좇은 결과가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 이 작품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매를 맞은 아다다가 집에서 나와 절벽 앞에 섰다가 차마 뛰어내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혼자 돌아다니는 장면이 있는데, 그 어떤 장면보다도 슬프게 느껴진다. 숱한 드라마에서 조연 내지 단역으로만 보았던 김일란 배우의 연기는 정말 끝내준다. 👍👍👍

영화 백치 아다다에서 주연을 맡은 신혜수 배우
영화 '아다다' 포스터. 다음 이미지

* 영화 '아다다'에서 신혜수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다음에서 이 영화를 검색하면 오른쪽 포스터가 나오는데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 무슨 19금 성인영화처럼 만들어 놓았다. 

* 1970년대에 MBC에서 일일 드라마로 만들었었다고 한다. 정영숙, 백일섭 주연.





꽃신 - KBS TV문학관 (강석우 이경진 이신재)


꽃신을 만드는 꽃신장이(갖바치)의 딸 분이와 소를 잡는 백정의 아들 상도. 이들은 이웃사촌으로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다. 단, 아버지끼리는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꽃신장이가 백정을 천하게 여긴 탓이다. 백정이란 직업이 역사적으로 워낙 천대를 받았던 터라 그가 그러는 게 유난하다고 할 순 없지만, 꽃신을 만들 때 소가죽을 사용하면서도 그러니 어불성설이라고 하겠다.

TV문학관 꽃신 - 이경진 / 강석우 (유튜브 캡처)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여덟 번째 작품 "꽃신"


: 1983.05.28 방영. 2023.04.24 재방영. 김용익 원작. 김하림 극본. 이유황 연출. 강석우 이경진 이신재 김난영 문오장 정재순 하대경 홍영자 신수강 오중훈 박정웅 공경구 김일란 이제신 이현정 조재훈 박승규 최우백 안정훈(아역) 이희경 안대선 최마리아 출연.


세월이 흐르고, 장인정신으로 만드는 꽃신은 고무신과 서양 구두에 밀려난다. 혼인 때나 신을 수 있는 특별한 신발이라는 의미도 퇴색해버렸다. 하루에 한 켤레 팔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지만 꽃신장이(이신재)는 오로지 꽃신만 고집한다.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빚이 늘어가도 다른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급기야 홀아비 최부잣집으로 하나 뿐인 딸이 종 살이를 하러 가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진짜 너무 하십니다~)


일편단심 분이만 바라보았던 상도는 분이네 집에 달려가 딸과의 혼인을 허락해달라고 한다. 분이의 모친(김난영)은 진심으로 좋아하지만 곧 불호령이 날아든다. "꽃신장이가 아무리 망했어도 고깃간 자식에게 딸을 줄성 싶으냐!" 한마디로 상놈의 자식에겐 내 딸을 줄 수 없다 버럭버럭. 꽃신장이를 아주 싫어했던 상도의 부친(문오장)조차 혼인을 허락하고 그 집 빚까지 갚아줄 생각이었는데, 자존심만 세우는 꽃신장이로 인해 모든 것이 어긋난다.

상도는 최부잣집으로 달려가 분이에게 함께 도망가자고 한다.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은 최부잣집 일꾼들이었다. "분이는 곧 안방마님이 될 아가씨란 말여!"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분이를 포기한 상도는 폐인처럼 산다. 보다 못한 부모는 동네를 떠나 친척집에 가 있게 한다. 그 뒤 전쟁이 일어나고 시간이 흐른다. 상도는 꽃신장이를 찾아 나서고 사는 곳까지 알게 된다.


다시 찾아갔을 땐 분이의 모친이 꽃신을 팔고 있었다. 모친은 눈물을 쏟으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털어놓는다. 분이가 갑자기 집에 돌아왔는데, 최부자가 '빚을 다 갚았으니 돌아가라'고 했다는 것(상도와 도망가기로 약속한 날 강간을 당한 듯). 정신이 나간 분이는 원래 살던 동네의 강이 보고 싶다고 하더니 집을 나가버렸고 얼마 뒤 그 강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꽃신을 신은 채로. 그 강은 분이와 상도 두 사람의 어릴 적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었다. 

햐.... 인간적으로 이야기가 너무 슬프다. 꽃신장이가 죽기 전에 후회하며 자기 잘못을 반성하긴 하지만 쌍욕이 나올 뿐. 사람이 자존심만 내세울 때 어떤 결과가 올 수 있는지 그 최대치의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마지막에 상도가 예전에 살았던 집을 한참 둘러볼 때 혹시나 무슨 반전이 있는 건 아닐까 기대를 해보았으나....... 분이와 상도가 너무 불쌍해서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듯하다.

TV문학관 꽃신 - 상도로 나온 강석우

* 분이의 아역으로 나온 배우가 아무리 봐도 이종희 같아서 찾아보니 맞다. 1993년 제2회 한국 슈퍼모델 선발대회 1위.

* 1978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2023-07-13

꿈 - KBS TV문학관 (정종준, 하미혜, 박상규)


MBC에 베스트셀러극장이 있다면 KBS에는 TV문학관과 드라마게임이 있었다. KBS는 유튜브에 '옛날TV'라는 채널을 만들어 추억의 드라마를 많이 올려놓았다. <꿈>도 올려져 있어서 실로 몇십 년 만에 다시 보았다. 감동~😭


조신스님과 달희가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TV문학관 꿈. 유튜브 캡처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꿈"


: 제96화. 1983. 08. 20일 방영. 2023.05.29 재방영. 
김재현 연출. 최경식 극본. 이광수 원작.
정종준, 
하미혜, 박상규, 황민, 이대로, 최주봉, 곽정희, 김기복, 이일웅, 공경구, 임성민, 최현철, 최용호, 박선희, 정민, 이창원, 최재현, 이두섭 출연.


정보를 찾아보며 새롭게 안 사실은 이 화의 원작이 김성동의 소설이 아닌 이광수의 소설 '꿈'이라는 것. 김성동의 '꿈'도 내용은 같다. 진짜 원작을 따진다면 삼국유사에 실려있는 '조신의 꿈' 설화일 것이다. 스포일러 주의를 외치기엔 제목이 이미 강력한 스포다. 그래도 외쳐볼까나? 줄거리 나옵니다. 주의하세요~


조신 스님이 있는 절에 달희라는 여성이 온다. 절에는 달희의 엄마가 모셔져 있다. 조신은 달희와 얘기를 나누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떠밀려 약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마음은 달희에게 향하고 스님으로 사는 것에 마음이 떠버린다. 조신의 번뇌를 알아챈 큰스님이 달희와 맺어지게 해 줄 테니 3일 동안 기도를 올리라고 한다. 그는 신나게 목욕 재계하고 목탁을 두드리며 열심히 염불을 외운다. 절에서 묵고 있던 달희는 조신을 불러내고,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도망치기로 한다. 

조신 스님이 목탁을 치고 있다
KBS TV문학관 꿈. 유튜브 캡처

조신이 배를 봐 둔 곳에 동료 스님 평목이 와있었다. 평목은 큰스님이 시켰다며 새 장삼을 건네준다. 두 사람은 어딘지 모를 곳에 가서 동네 사람의 도움으로 자리를 잡는다. 아이도 낳고 이제 좀 잘 살아보려는데 평목이 나타난다. 멀리 도망간 줄 알았더니 이렇게 가까이 있었냐면서 달희의 아버지와 약혼자가 두 사람을 찾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준다. 마음이 급해진 두 사람은 다시 도망가는데 그 와중에 아이가 죽고 만다. 세월이 한참 흐르고, 두 사람은 딸을 키우며 살고 있다. 탁발을 다니던 평목은 달희를 닮은 여학생을 보고 따라가는데 그곳에서 달희와 눈이 마주치고 서로를 알아본다.


조신은 평목을 반가워하며 하룻밤 묵어가게 한다. 평목은 달희의 약혼자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며 둘이 도망가는 바람에 절이 망하고 그 때문에 자신도 전국을 떠돌게 되었다고 은근히 조신을 탓한다. 더 나아가 자기도 달희한테 마음이 있었다며 이제와 달례를 넘볼 순 없고 딸을 (부인으로) 달라고 한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소리를 들은 조신은 분노에 겨워 평목을 죽여버린다. 그리고는 마을 어딘가에 자살한 듯 위장시켜 놓지만, 집에서 미처 치우지 못한 평목의 바랑(짐보따리)을 순사가 발견하면서 조신은 감옥에 갇힌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딸 뿐이고 부인은 그 아버지에게 붙들려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도망칠 당시 큰스님이 주셨다는 장삼을 입고 조신은 교수대에 선다. 목이 매달리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조신을 보고 스님들이 껄껄껄 웃는다. 파란만장한 꿈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은 조신은 세상이 그저 다 예뻐 보일 뿐이다. 달희는 약혼자와 집으로 돌아가고 조신은 달희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준다. 그리고 꿈을 꾸기 전엔 망설였던 참선 수행에 기꺼이 들어간다.     


나도 이런 꿈을 꾸면 정신이 확 들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조신의 꿈 내용이 해피엔딩이었다면?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온 가족 잘 먹고 잘 살다가 극락왕생하는 결말이었다면? 대리만족해 봤으니 그걸로 되었다~ 할 수도 있겠지만, 속세의 삶에 미련을 못 버리고 결국엔 절을 뛰쳐나가는 스토리가 나왔을 수도 있지 않을까?
 
'꿈'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잠을 잘 때 보는 환각도 꿈이고, 미래에 하고 싶은 희망사항도 꿈이고, 현실성 없는 얘기도 꿈이라 하고. 어릴 때부터 가졌던 꿈을 이룰 가능성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버리지도 못하고 이루지도 못하고 꿈에 계속 휘둘리며 살고 있으니 이렇게 깨끗이 깰 수 있는 꿈이 부러울 뿐이다.  

KBS 티비문학관 꿈. 왼쪽부터 박길라, 하미혜, 임성민, 박상규. 유튜브 캡처

* 조신의 딸로 나오는 박선희는 '박길라'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한다. 20대 초반 콘서트 도중 심장 발작으로 돌아가셨다고. 노래를 들어보면 목소리가 정말 맑은데.. 너무 아깝다.

 
* 출연자 중에 임성민이 있길래 설마 했더니 미남 배우의 대명사 그 임성민이 맞았다. 꿈에서는 여주인공의 약혼자로 나오는데 풋풋한 소년미마저 느껴진다. 간경화로 39세에 요절. 드라마를 하차하고 치료에 전념했다면 어땠을지 생각할수록 안타까울 뿐이다.
 
* 평목 스님으로 나온 박상규는 국립극장 전속 배우였다. 그가 주인공으로 나온 '간계와 사랑'이라는 연극을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보았는데 아주 멋있었다. 내 뒷자리에 당시 신인이던 신애라 배우가 앉아있던 게 추억이라면 추억이다.

* 극에 나오는 절은 변산 내소사. 전북 부안군 소재. 사찰과 더불어 전나무숲길이 유명하다.


카인의 후예 - KBS TV문학관 (민욱 김진해 김미숙 임혁)


1946년, 동네잔치 중인 양지면에 공산당원들(임혁 외)이 나타난다. 이들의 목적은 박훈(민욱)을 비롯한 마을 지주들에게서 땅과 재산을 빼앗는 것이다. 땅을 빌려 먹고살던 소작농민들은 땅을 가질 수 있게 해주겠다는 공산당의 선동에 넘어가 지주들을 숙청하는 일에 앞장선다.
 
박훈과 도섭 영감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TV문학관 카인의 후예. 웨이브 캡처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여덟 번째 작품 "카인의 후예"


: 1983년 방영. 2023.04.17 재방영. 황순원 원작. 이재원 극본. 장기오 연출. 민욱, 김진해, 김미숙, 임혁, 강민호, 양영준, 이구순, 김종결, 안광진, 박상만, 이두섭, 정종준, 이수연, 봉혜선, 이난희, 장순철, 장희진, 박현정, 최용호, 이원종, 김동완, 유순철, 이한수, 구우룡, 윤성국, 신원균 출연.


이 일에 가장 나서는 사람은 박훈의 집안에서 충직하게 일했던 도섭 영감(김진해)이다. 박훈의 집 살림을 도와주고 있었던 그의 딸 오작녀(김미숙)는 아버지로부터 몽둥이찜질을 당해도 그 집을 떠나지 않는다. 심지어 박훈과 부부가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박훈을 지키는 일에 혼신을 다한다.



딸 때문에 일이 틀어진 도섭 영감은 과거에 자신이 세웠던 박훈 집안의 공덕비를 때려 부수고, 공산당이 되어 나타난 오작녀의 전 남편(강민호)은 박훈에게 오작녀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라며 주먹을 날린다. 박훈은 그간 오작녀에게 선을 긋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서로 좋아했지만 신분의 차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소문이 도는 사이. 그는 사촌동생 혁(이구순)의 설득으로 마을을 떠나기로 결정하면서 오작녀와 함께 가기로 마음먹는다. 

그 와중에 실종된 혁의 아버지 박용제(양영준)가 마을에 나타나는데 도섭 영감의 고자질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혁은 도섭 영감을 죽이겠다고 박훈에게 알린다. 어렸을 때 죽을 뻔한 자신을 도섭 영감이 구해줬었는데 그가 더 무섭게 변하기 전에  죽여주는 것이 그 은혜를 갚는 길인 것 같다면서. 그 말을 들은 박훈은 그 일을 자신이 하기로 결심하고, 오작녀에게 편지를 쓰지만 결국은 없애버린다. 한편 공산당은 도섭 영감의 아들 삼득이 지주 박용제의 묏자리를 준비해 줬다는 이유로 영감을 쫓아내 버린다. 지주와 농민 사이를 효과적으로 이간질하기 위해 선택된 사람이 도섭 영감이었는데 그 쓸모가 없어지자 핑계를 만들어 팽해버린 것이다. 
 

 
박훈은 칼을 숨겨놓은 곳으로 도섭 영감을 데려가서는 그를 찌른다. 도섭 영감도 갖고 있던 낫을 박훈에게 휘두른다. 영감이 다시 박훈을 공격하려는 순간 삼득이 나타나 아버지를 말린다. 그러다 자기 낫에 아들이 다쳐 피를 흘리자 영감은 왜 자기를 [진즉] 죽이지 않았느냐며 박훈을 향해 절규한다. 삼득은 박훈에게 누님을 데리고 어서 여기를 떠나라고 부탁하고,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박훈은 휘청대며 자리를 뜬다. 그는 과연 오작녀와 함께 떠날 수 있을까? 열린 결말이긴 하지만 박훈이 입은 상처가 심해 보이고 오작녀에게 편지를 주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그닥 희망적인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 더구나 질투심에 사로잡혀 친동생 아벨을 죽인 존속 살인자.
가족처럼 지냈던 사람들이 한순간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서로를 죽이는 비극.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어 자기 이득을 취하는 추악한 세력.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박훈과 오작녀가 마주 바라보고 있다
TV문학관 카인의 후예. 웨이브 캡처


* 사실 드라마만 보았을 땐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소설 줄거리를 읽고 나니 정리가 되었다.

* 소설 줄거리를 보니 드라마와 다른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드라마에선 박용제가 총에 맞아 죽었는데 소설에서는 자살을 한다. 여기 말고 다른 곳이 더 있을 수 있다. 또 말하지만 드라마만 보고 소설을 읽은 척해서는 안 된다.

* 수동적이던 박훈이 살인까지 실행에 옮기는 인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나 도섭 영감, 오작녀 등 주요 인물의 심리를 더 잘 파악하기 위해서는 원작 소설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 오작녀로 나온 김미숙 배우가 아주 인상적이다. 도섭 영감으로 나온 김진해 배우의 연기는 최고다.



벙어리 삼룡이 - KBS TV문학관 (김영철 선우은숙 강태기)


아무 곳에나 버려져 있던 아기를 한 스님(박용식)이 발견한다. 절에는 마침 자식을 얻으려고 불공을 드리던 양반집 마님(서우림)이 있었다. 스님은 마님에게 이 아기를 데려다 키우면 자식이 생길 것이라고 단언한다.

삼룡이가 등에 업은 아씨를 보며 활짝 웃고 있다
KBS TV문학관 벙어리 삼룡이. 유튜브 캡처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벙어리 삼룡이' 


: 제95화. 1983.08.13 방영. 2023.05.22 재방영. 나도향 원작. 윤대성 극본. 맹만재 연출. 
김영철, 강태기, 선우은숙, 양영준, 서우림, 권미혜, 권기선, 봉혜선, 곽정희, 박용식, 이원종, 유순철, 오기환, 김창봉, 박상만, 신원균, 전광렬, 정재순, 이난희, 김소유, 김효진, 최용팔, 심동훈, 최용호, 이만주 출연.


세월이 흐르고 아기는 오생원(양영준) 집 하인 삼룡이로 자라났다. 스님 말대로 마님은 아들(강태기)을 얻었는데, 오냐오냐 키운 탓에 장난으로 동물을 죽이고 농작물을 망치는 개망나니가 되었다. 삼룡이 덕분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말을 가장 싫어하는 3대 독자는 아버지한테 혼나거나 기분이 나쁠 때면 삼룡이를 때리는 것으로 그 화를 푼다. 한마디로 강약약강. 바보처럼 착하기만 한 삼룡이는 이유도 모른 채 늘 얻어맞는다.


오생원은 사실 공명첩으로 양반 신분을 산 처지였다. 가난하지만 진짜 양반인 집에 땅과 재산을 주고 그 집 딸(선우은숙)을 며느리로 데려온다. 하지만 3대 독자는 주막집 딸 안실(권기선)과 이미 뜨거운 사이였다. 혼인 첫날밤부터 잔뜩 취한 것도 모자라 처가에 인사하러 가는 것도 때려치우고 안실과 놀아난다.

아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호감을 가진 삼룡이는 혼자 신행 가는 아씨를 극진히 모신다. 그 뒤로도 아씨가 힘들어할 때면 바보 흉내를 내며 웃게 만든다. 그런 삼룡이가 고마웠던 아씨는 복주머니를 만들어 선물로 준다. 너무 기뻤던 삼룡이는 여기저기 자랑을 하고 다니는데, 이것이 마치 아씨가 그에게 준 정표처럼 소문이 난다. 삼룡이가 애지중지하는 복주머니를 본 3대 독자는 아씨를 심하게 구타한다. 보다 못한 삼룡이가 3대 독자를 밀쳐내고 아씨를 구해낸다. 개망나니의 매타작은 삼룡이의 몫이 되고 안채 출입도 금지당한다.

삼룡이가 아씨에게서 복주머니를 선물 받았다
KBS TV문학관 '벙어리 삼룡이'. 김영철/선우은숙

이 와중에 안실은 오생원 집에 쳐들어와 3대 독자의 아이를 가졌다며 소란을 피운다. 3대 독자는 안실이와 살겠다고 선포한다. 마님은 이 모든 탓을 며느리에게 돌린다. 그것도 모자라 벙어리에게 연정을 품을 줄 몰랐다며 친정으로 돌려보내겠다고 겁박한다. 절망에 빠진 아씨는 남편에게 또 구타를 당한다. 아씨가 걱정된 삼룡이는 안채로 몰래 들어갔다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아씨를 보게 된다.


삼룡이가 아씨를 겨우 구했건만 인사는커녕 보쌈으로 오해를 받아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오생원 집에서 쫓겨난다. 동네를 떠돌다 아무 곳에서나 졸고 있는데 불이 났다는 소리가 들려온다. 삼룡이가 달려갔을 땐 이미 안채가 불타고 있었다. 방 안에 들어가니 3대 독자가 살려달라며 달려든다. 처음엔 밀쳐냈지만 삼룡이는 이내 그를 구해준다. 그리고 다른 방에 쓰러져 있는 아씨를 발견해 끌어안고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토하며 절규한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지붕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삼룡이. 아씨를 안은 채 포효하던 그는 기와 위에 주저앉는다.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각자의 상상에........)

불길 속에서 삼룡이가 아씨를 안은 채 울부짖고 있다
KBS TV문학관 '벙어리 삼룡이'. 유튜브 캡처

몇십 년 만에 다시 본 벙어리 삼룡이는 고구마 천 개 아니 만 개 아니 천만 개를 먹은 듯 속이 미어지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내용이었다! 백치 아다다와 맞먹는 수준의 핵핵핵고구마!

장애를 가진 천애고아 머슴과 돈에 팔려 시집와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아씨. 동병상련으로 서로를 챙겨주던 두 사람을 부도덕한 사이로 낙인 찍은 건 정작 가족 같은 사람들이었다. 삼룡이가 언어장애를 가졌어도 오생원 부부가 그를 친자식처럼 키웠다면? 3대 독자를 애초에 안실과 맺어주었더라면? 그 누구도 삼룡이와 아씨 사이를 모함하지 않았다면?
그놈의 체면과 지위, 남의 눈에 사로잡혀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진 않았는지 되돌아보라고 벙어리 삼룡이가 말하는 듯하다.
 


* 원작에서는 삼룡이가 아씨를 구해내고 바로 숨을 거둔다고 한다. 너무 비극적이잖아~

* 마지막에 오생원 집에 왜 갑자기 불이 났을까 의문이 드는데, 티브이문학관에서는 안실이 답답하다며 주막을 뛰쳐나가는 장면이 화재 직전에 나온다. 그래서 혹시 안실이 불을 지른 게 아닐까 추측해 보게 된다. 그나저나 이 화재 장면을 어떻게 찍은 것일까? 아무리 봐도 기와집에 정말 불을 지르고 찍은 것 같은데. 김영철 배우의 연기에 감탄했다.

* 미소년 같은 고 강태기 배우의 외모에 심쿵했으나 실감 넘치는 호로자슥 연기에.......🙄

* 출연진 중 전광렬이 있는데 그 전광렬 배우인지 모르겠다.

* 김진규 배우가 삼룡이로 나온 영화를 아주 어렸을 때 보았는데 연기가 대단했다는 것과 몹시 슬펐던 것만 기억난다. 
 



2023-07-11

물레방아 - KBS TV문학관 (하미혜 김기섭)


주막에 한 남자가 들어온다. 주인아주머니(여운계)에게 오래전 물레방앗간에서 있었던 일을 아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시작되는 회상.


두 남녀가 입을 맞추려 하고 있다
KBS TV문학관 물레방아. 웨이브 캡쳐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열 번째 작품 '물레방아'


: 제94화. 1983.08.06 방영. 2023.05.15 재방영.
나도향 원작. 백결 극본. 김충길 연출. 김기섭, 하미혜, 박병호, 이신재, 여운계, 백수련, 하대경, 유병준, 신수강, 홍영자, 김시원, 김윤형, 기정수, 박현정, 송종원, 서영진, 이종남, 박종완 출연.


== 줄거리 나옵니다. 스포 주의하세요 ==


여기저기 떠돌며 사는 방원(김기섭)은 새로운 마을에 들어선다. 계곡에서 세수를 하다가 둥둥 떠다니는 버선 한 짝을 발견한다. 그리고 마을 잔치에서 버선을 한쪽만 신은 여자(하미혜)를 보게 된다. 빼어난 외모와 색기로 시선을 사로잡는 여자. 방원은 무언가에 홀린 듯 여자를 뒤따라간다. 물레방앗간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욕망을 숨기지 않고 하룻밤을 보낸다. 날이 밝고 방원이 정신을 차렸을 땐 곁에 아무도 없었다. 떠나려던 생각을 접은 그는 강첨지네(이신재) 머슴으로 일하면서 여자를 다시 만나기를 소망한다.
 
어느 날 방원은 길에서 관을 따라가는 사람을 보게 되는데 다름 아닌 그 여자, 금분이었다. 남편의 장례를 치루는 중이었던 금분은 방원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말한다. 강첨지는 하인 길보(하대경)에게 당장 빚을 받아오라고 시키는데 방원이 따라가 보니 바로 금분의 집이었다. 금분이 빚 갚을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아는 강첨지가 그녀를 후처로 삼으려고 머리를 굴린 것이다. 이에 방원은 자신을 다른 부잣집에 팔아서 금분의 빚을 대신 갚아준다.
 

 
부부가 된 두 사람은 신주사(박병호) 집에 들어가서 하인으로 산다. 신주사는 금분을 보고는 한눈에 반해버린다. 옹기 가마를 운영하는 그는 방원을 가마에서 지내게 하고는 금분을 돈으로 유혹한다. 오랜만에 집에 온 방원은 금분에게서 이상함을 느끼고 무당을 찾아가 비방을 얻는다. 비방에는 다른 여자 속옷이 필요했는데, 이를 훔치다 들키는 바람에 신주사 집에서 완전히 쫓겨나 버렸다. 그렇게 동네를 떠돌고 있을 때 어딘가 바쁘게 가는 금분을 목격하고 따라 나선다. 
 
문이 잠겨진 물레방앗간 안에는 금분과 신주사가 있었다. 방원은 신주사의 옆에 낫을 내리찍는다. 식겁한 신주사는 서둘러 자리를 뜨고, 방원은 금분에게 다른 곳에 가서 살자고 애원한다. 하지만 금분은 구차하고 천한 것이 싫다며 거부한다. 분노에 사로잡힌 방원은 금분을 몰아세우고 실랑이를 벌인다. 이내 금분이 바닥에 쓰러지고.......
 
물레방앗간을 다시 찾아온 남자는 하염없이 떨어지는 물을 보며 눈물을 짓는다.
 

 
나도향의 소설 '물레방아'. 필독서였지만 안 읽었다. 읽지 않은 게 자랑은 아니지만 꼭 읽으라고 하면 왠지 더 피하고 싶은 것이.... 나만 그랬을까? 그래서 이런 영상물 보는 것으로 독서를 대신하곤 했는데, 이 '물레방아' 역시 TV문학관을 보고 소설 읽은 척을 해서는 안 된다. 소설 에서는 방원이 칼로 금분을 죽이고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극에서는 방원이 금분의 목을 조른다. (곧 기둥 같은 것에 가려지기 때문에 화면에는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금분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리송하면 극 초반에 나온, 남자와 주막 주인의 대화를 되새겨보면 된다. "신주사네 하인이 바람난 저 여편네를 죽였는데 그래도 그 사내는 그 계집을 못 잊어서 울면서 울면서 주재소 순검한테 끌려갔는데 도대체 사내와 계집의 사이란 건 알다가도 모르겠습디다" 
 
한순간 본능에 이끌려 자기 인생 전부를 걸어버리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어리석음이랄까 용감함이랄까 무모함이랄까 그 종잡을 수 없고 복잡한 존재라는 점이 인간을 예측불허의 삶으로 이끈다. 그래서 인생은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한복 차림의 여자가 웃고 있다
KBS TV문학관 물레방아. 금분 역의 하미혜


2023-07-10

감자 - KBS TV문학관 (조태숙 김해권 민지환)


초라한 행색에 어두운 표정의 두 남녀가 부지런히 걷는다. 해가 지기 전에 평양성 안에 들어가려 했으나 지쳐서 길에 주저 앉는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지나가던 넝마주이가 말을 건넨다. 두 사람, 복녀(조태숙)와 복녀의 남편(김해권)은 넝마주이(문오장)의 집 골방에서 지내게 된다.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고향을 떠나왔지만 새로운 동네 칠성동에서도 먹고 살 길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복녀가 몸을 판 뒤 돈을 받고 있다
 KBS TV문학관 감자. 복녀 역의 조태숙

UHD로 만나는 티브이 문학관 "감자"


: 제 154화. 1984.10.20 방영. 2023.07.10 재방영. 김동인 원작. 전세권 연출. 박찬성 극본. 조태숙, 김해권, 민지환, 문오장, 홍영자, 신수강, 박병호, 장학수, 방숙례, 이한나, 반효정, 조인표(아역) 등 출연.  

=== 줄거리 나옵니다 스포일러 주의 ===


남편은 복녀가 돈을 벌어오면 그것으로 지게를 사서 일을 하겠다고 한다. 자기는 비럭질을 할 수 없다며 복녀에게 하라고 강요한다. 복녀는 할 수 없이 구걸을 하러 다니지만 팔다리 멀쩡하고 젊디 젊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냥 선배인 동네 꼬마(조인표)의 조언대로 복녀는 장애인인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산다. 복녀가 그렇게 번 돈으로 남편이 지겟꾼 일을 시작하지만 길에서 자빠져 자느라 손님을 놓친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도 복녀의 남편은 지독한 게으름뱅이에 농사 일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나중엔 그에게 땅을 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남편이 복녀를 마음대로 부려 먹는 건 전재산 80원을 들여 그녀를 사왔기 때문이었다. 복녀는 원래 선비 집안의 딸이었는데, 가세가 기울면서 집을 정리해도 빚을 다 갚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복녀는 어머니(반효정) 뜻에 따라 열다섯 어린 나이에 자기보다 무려 스무 살이나 많은 홀애비와 혼인해야 했다. 

딸 같은 복녀를 안타깝게 여기던 넝마주이의 부인(홍영자)은 송충이 잡는 일을 소개해준다. 이 일에는 동네 여자들이 대거 동원되었는데, 일하는 중에 감독관(장학수)과 함께 사라지는 여자는 돈을 더 받았다. 처음엔 복녀도 그런 여자들을 욕했으나, 감독관에게 몸을 팔고 일당보다 더 큰 돈을 벌게 되자 그 짓을 계속 하게 된다. 


어느 날, 복녀의 남편이 장물을 사는 바람에 주재소에 잡혀간다. 모르고 그랬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복녀는 몸을 팔아서 구한 돈으로 남편을 빼낸다. 남편은 복녀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다 알면서도 말리기는커녕 그 돈으로 먹고 산다. 술에 취해 소리를 내지르고 '잘못했어요' 양손을 빌며 울부짖지만 자책하는 건 그때 뿐이다. 

복녀는 왕서방(민지환)의 밭에서 감자를 훔치다 걸리지만 몸으로 위기를 넘긴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지속적으로 몸과 돈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된다. 심지어 왕서방이 복녀의 집에 오기로 하면 남편은 순순히 자리를 비워준다. 복녀는 고향에 꼭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몸을 팔아) 돈을 모은다. 

그런 복녀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다름 아닌 왕서방이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돈벌이에 위기를 느낀 복녀는 왕서방 집에 찾아가 새색시와 자고 있는 그를 칼로 위협한다. 

실랑이 끝에 칼에 찔린 사람은 복녀였다. 왕서방은 의원에게 돈을 주고 사인을 조작한다. 복녀의 남편에게도 큰 돈을 쥐어주고 입을 막는다. 그날 밤 복녀의 집에 불이 난다. 화면이 바뀌고,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복녀의 남편이 관을 지게에 지고 마을을 떠난다. 처음 이 동네에 들어올 때 밟았던 길을 다시 밟으면서.



너무 가난하던 보릿고개 시절, 삶의 첫 번째 명제는 '생존'이었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는 것. 가난이 무서운 건 어떤 일이든 하게 만드는 명분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복녀는 어떻게든 돈을 벌려다 도덕의 선을 넘게 되었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품으며 도덕성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 희망은 복녀를 파괴 시키고, 그럴 수록 복녀는 희망에 매달려 더욱 열심히 몸을 판다. 복녀의 마지막 보루가 복녀를 망가뜨리는 원인이 되는 아이러니(irony). 복녀에게 돈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렸다.

부모와 남편 잘못 만나 타락하고 개죽음까지 당한 복녀. '감자'도 보고 나니(소설까지 다시 읽고 나니) 고구마 천 개는 물 없이 삼킨 듯하다. 왕서방을 기다리며 화장하는 복녀를 위해 남편이 거울을 잡아주는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인간성을 상실한 두 인간의 모습을 이보다 더 잘 압축해서 보여줄 수 있을까? 뛰어난 화면 연출에 감탄했다. 추천!

화장하는 복녀를 위해 남편이 거울을 들어주고 있다
 KBS TV문학관 '감자'

* 화재 장면은 원작 소설에는 없는데, 남편이 집과 함께 복녀의 시신을 태운 게 아닐까? 칼에 찔려 죽은 것을 뇌일혈로 조작했으니 시신이 썩기 전에는 들통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은? 아무래도 남편이 복녀의 관을 매고 고향으로 향하는 것처럼 연출한 느낌인데 재가 된 복녀가 들어있지 않을까 소설을 써본다(또 관이 가벼워 보이기도 하고🙄).

* 이 작품에서 말하는 '감자'는 고구마라고 한다. 옛 한국어에서 감자(Potato)를 저(藷) 또는 북저(北藷)라 불렀고 고구마(sweet potato)를 달콤한 저, 즉 감저(甘藷)라고 불렀다(나무위키 참고).  



2023-07-08

분례기 - KBS TV문학관 & SBS 창사 특집 드라마


'분례기'하면 사실 SBS 드라마가 먼저 떠오른다. 방영 당시 재미있게 봐서 그렇기도 하지만 티비문학관보다는 한참 뒤에 본 탓이다. sbs는 개국 초기(대문자 아닌 소문자 시절) 토속적인 작품을 곧잘 만들었었다. '분례기'도 그중 하나였다. 듣기만 해도 무슨 냄새가 날 것 같은 이름의 주인공 '똥례'를 '신영진'이라는 신인 배우가 어찌나 잘 그려내던지 그래서 더 인상에 남은 것도 있다.


냉수 한 그릇 떠놓고 분례가 혼인식을 하고 있다
KBS TV문학관 분례기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여섯 번째 작품 '분례기'


: 1983.05.14 KBS 방영. 2023.4.10 재방영. 방영웅 원작. 최경식 극본. 김재현 연출. 이덕희, 김인문, 장항선, 장학수, 박혜숙, 최주봉, 김난영, 정종준, 최선아, 이원종, 곽정희, 황민, 박현정, 조은덕, 방숙례, 박선희, 안성태, 박해상, 공경구, 이동진 출연.


쪽두리에 한복을 차려 입은 분례
SBS 창사 특집 드라마 분례기

SBS 창사 특집 드라마 "분례기"

: 1992.01.20 ~ 03.10 SBS 방영. 16부작. 방영웅 원작. 장구태 극본. 이종한 연출. 신영진, 윤여정, 윤문식, 이동진, 김인문, 나문희, 양금석, 장항선, 최낙천, 여운계 등 출연.


 다시 본 TV문학관 '분례기'는 요즘 말로 핵핵핵 핵고구마였다! sbs 드라마 내용도 다르지 않았을 텐데 과연 내가 이걸 재밌게 보았단 말인가? ??? 옛날엔 귀하게 키우면 귀신이 일찍 데려간다고 해서 이름을 천하게 지었다는 속설도 있지만 그거야 좀 사는 집 얘기일 것이고, 분례[똥례]의 경우엔 화장실[뒷간,똥둑간]에서 낳았다고 그냥 붙인 이름이다. 열여덟살 분례(이덕희)의 일과를 보면 살림도 하고 나무도 베어 오고 일당백 집안 일꾼이다. 고자로 소문난 동네 유부남 용팔(장학수)을 따라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는데, 어느 날 이 놈이 분례한테 성욕을 느끼고는 강간을 해버린다. 고자라고 안심했다가 무방비로 당한 것이다.

 노름방에서 심부름을 해주며 개평으로 먹고 사는 분례의 아빠 석씨(김인문)는 노름꾼 영철(장항선)의 모친(김난영)으로부터 분례를 며느리로 달라는 얘기를 듣는다. 비록 3대 독자는 노름에 미쳐 있고 며느리가 여러 번 바뀌긴 했지만 국밥집을 운영하며 꽤나 먹고 사는 집안이다. 더구나 땅까지 떼어준다고 하니 지지리궁상 석씨에겐 아주 솔깃한 제안이다. 하지만 처음엔 단칼에 거절했다가 노름꾼 승원(최주봉)에게 무시를 한번 당하고는 분례를 그 집에 보내기로[팔아먹기로] 결심한다. 분례의 엄마(박혜숙)는 진즉부터 딸을 이용해 빈곤을 해결하고 싶어 했다. '니 한 몸 죽어서 친정 식구들 살린다고 생각해라', '잘 살고 못 살고는 다 너한테 달렸다' 따위의 조~옥같은 말들을 해주며 눈물을 짜는 엄마라니. 그 모습이 가증스럽다. 
 

 
자랑할 만한 혼사가 아니기에 석씨는 마을 사람들 몰래 딸을 데리고 영철의 집으로 간다. 그 며칠 전 마을에서는 큰일이 있었다. 분례의 친구 봉순(최선아)이 혼인을 앞두고 목을 맨 것이다. 동네 상여막(=상여 창고)을 자주 들여다보았던 분례는 봉순이 승원과 같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둘이 꽤 깊은 사이처럼 보였으나 이내 승원은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동네에 소문을 내겠다며 봉순을 협박하고 있었다. 분례는 자신이 강간당한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듯 친구의 일도 말하지 못했다. 봉순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은 실상도 모르면서 봉순을 욕한다. 특히 용팔의 처와 분례의 엄마가 목소리를 높인다. 
 
국수 한 그릇과 물 한 대접 놓고 초라하게 혼례를 올린 분례는 그나마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인간 답게 산다. 밤새 노름방에 가 있는 남편을 대신해 장에서 사온 다람쥐를 친구 삼아 외로움을 달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영철이 폭탄선언을 한다. 한몫 크게 챙기면 다 그만둘 거라고.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큰돈을 따서 분례에게 맡긴다. 자기가 돈을 달라고 해도 절대 내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곧 다시 노름에 미쳐서는 승원에게 돈 심부름을 시킨다. 
 

 
다람쥐와 놀고 있었던 분례는 돈 구경도 못 했다며 승원을 쫓아 버리고, 승원은 방 밖에서 분례의 말소리만 듣고는 분례가 서방질을 했다고 영철에게 전한다. 그 말에 돌아버린 영철은 집으로 달려와 분례를 무자비하게 패고는 그 돈을 가져다 모두 잃는다. 시어머니 역시 남의 말만 듣고 분례에게 나가라고 소리친다. 해명 한 번 못하고 쫓겨난 분례는 친정으로 되돌아오는데 눈빛부터 정상이 아니다. 놀란 분례의 부모는 딸을 위해 굿판을 열지만 그 소란을 틈 타 분례는 사라져 버린다. 어딘가로 가고 있는 분례를 본 용팔이 그 서러운 이름을 목놓아 부를 뿐. 
 
아아 혈압이 솟구친다!
원작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는데 줄거리를 보니 드라마보다 더 하다. 분례가 노름꾼 남편에게 얻어 맞고 쫓겨났을 때 동네 놈팡이들한테 집단으로 강간을 당한다고.... 조카 십팔색 크레파스 샹샹바!

승원이 봉순을 협박했다고 폭로해서 그놈을 진즉에 개박살 냈더라면 어땠을까? 승원이 석씨에게 (떵 닦을) 종이를 가져다 달라고 했을 때 석씨가 종이 대신 따귀를 날린 것에 대한 복수를 그 딸에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 정말 개스키... 물론 남의 말 한마디에 부인 패고 쫓아낸 놈도 개스키. 강간하는 놈들도 개스키. 딸을 팔아먹은 부모들도 개스키. 분례의 인생이 여성 수난사 그 자체이다. 
 


작아질 대로 작아진 분례의 모습 위로 깔리는 김동애의 창이 어찌나 구슬프게 들리는지, 그간 험난한 시대를 살아왔고 앞으로 또 살아갈 수많은 분례들이 새삼 그 위로 겹쳐진다. 
 

* 영철 모친(김난영)과 노름방 주모(곽정희), 무당(박현정)으로 나온 세 배우가 굉장히 닮아 보인다.

* 분례의 동생으로 요절한 가수 박길라(박선희)가 나온다.

* 원작 소설을 쓴 방영웅 작가는 2022년에 돌아가셨다. 

* 윤정희, 이순재, 허장강 주연의 영화도 있다. 1971년 개봉. 유현목 감독.

* SBS 분례기의 주인공 신영진 배우는 1994년 활동을 그만두고 캐나다에서 오래 살았다고 한다. 출판사, 안경원 등에서 일했다고. 10년 만에 다시 복귀해서 지금은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