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MBC베스트극장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MBC베스트극장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24-10-03

늪 - MBC 베스트극장 (박지영 하주희 김진근 / 김윤철 연출)


한 여자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늪' 타이틀 / 웨이브 캡처


'늪'은 600편이 넘는 베스트극장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알려진 작품일 것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유명한 김윤철 PD가 연출한 것으로 당시 본방으로 보았다가 큰 충격을 받았었다. 시청자 게시판에도 글이 쏟아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외국에서 큰 상을 받으면서 더 유명해졌다. 수상 기념으로 감독판을 방영해주었는데, 현재 웨이브에서 제공되고 있는 것이 어느 버전인지 모르겠다. 수상 후 출시된 DVD의 런닝타임이 1분 남짓 더 긴 것으로 보아 이게 감독판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주인공과 상간녀가 마주 보고 있다
박지영 배우 연기 미쳤다.... /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 559화 "늪"

: 2003.11.21 방영. 2004년 몬테카를로 텔레비전 페스티벌 TV영화부문 최고작품상 수상. 2004.07.09 재방영. 도현정 극본. 김윤철 연출. 박지영, 김진근, 하주희, 송재호, 정한헌, 이상숙, 조현숙, 김기현, 조명진, 이미선, 공재원, 구미옥 출연.


💔💔💔 스포일러 주의 💔💔💔


이 작품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복수극이다. 주인공 윤서(박지영)는 의사로써 엄마로써 아내로써 남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 준영(김진근)은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상대가 윤서의 친한 동생 채원(하주희)이었다. 윤서는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느낌을 감지하고 의심만 하다가 결정적인 증거를 잡게 된다. 


여자의 손톱이 남자의 등에 흉터를 만들고 있다
혹시라도 걸릴 까봐 어둡게... / 웨이브 캡처


그 와중에 아버지(송재호)가 쓰러지고, 윤서는 간호에 매달린다. 상태가 좋아지고 있던 아버지를 준영에게 하루 맡기고 쉬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온다. 아버지는 이미 사망했고 남편은 병원에 없었다. 두 놈년의 바람으로 소중한 아버지까지 잃게 되자 윤서는 치밀하게 복수를 준비한다.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보니 처음 보았을 때와는 감상이 확실히 다르다. 자신에게 헌신한 아버지를 허망하게 잃고 정신이 나가버린 윤서를 너무나 이해한다. 하지만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딸은 어쩌라고욧~! 남편을 고자로 만들고 채원을 정신병원에 집어 넣었지만, 고자도 성생활을 포기하면 재혼은 가능할 것이고 채원도 언젠가는 세상 밖으로 나올 것이다.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는 준영과 채원이 다시 만나 함께 딸을 키우는 것! 참 별놈의 상상을 다 하고 앉았지만 실제 상황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 아닌가?

윤서씨, 아무리 열 받고 미칠 것 같아도 딸을 위해서 어떻게든 악착같이 살았어야 하지 않을까요?
😭😭😭 대체 저런 놈을 뭘 믿고 그런.......

나이가 들긴 들었다. 이런 후속편(?)이나 생각하고 있으니. 딸 진희가 커서 아빠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고 엄마의 복수를 진행하는. 만약 준영이 채원과 계속 관계를 맺고 있다면 진희가 둘 다 끝장내버리는 잔혹극으로다가.......😑😑😑

지금 봐도 군더더기 없는 짜임새와 연출이 기가 막힌다. 배우들의 연기도 최고.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남의 것을 탐하지 말자.

2024-07-29

그녀의 화분 NO.1 - MBC 베스트극장 (김선아 정찬 홍일권 김래원)


무역회사에서 전화 연결해주는 일을 하는 현아(김선아)는 본의 아니게 통화 내용을 듣게 된다. 그러다 보니 회사 사람들의 비밀이나 사생활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현아가 짝사랑하는 총무부의 도훈(홍일권)은 쉬는 날 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현아는 한껏 외모에 신경을 쓰고 그가 가는 청각장애인 학교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 선생과 도훈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절망한다.


김선아가 정찬에게 기대고 있다
웨이브 캡처 / 저작권자 MBC


MBC 베스트극장 제323화 "그녀의 화분 No.1"


: 1998. 07. 31 방영. 윤성희 극본. 김윤철 연출. 김선아, 정찬, 홍일권, 김래원, 전유진, 김복희, 문회원, 차윤회, 이명숙, 최한호, 조향이, 손소영, 이경순 출연.


그래도 말이나 해보자는 심정으로 도훈에게 고백하지만 바로 거절 당한다. 선재(정찬)는 길에서 울고 있는 현아를 보게 된다.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그녀를 지켜보는 시선. 현아는 치한을 피해 자리를 옮기다 선재를 발견하고 그 자리에 앉아버린다.

사실 두 사람은 청각장애인 학교에 갔던 날 버스에 나란히 앉았었다. 현아가 본 선재는 아이와 수화로 인사를 나누었고, 선재가 본 현아는 그날도 혼자 울고 있었다.

잔뜩 취한 현아는 속상한 마음을 선재에게 털어놓는다. 그가 청각장애인이라 자신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재는 사실을 바로 밝히지 못하고 연기 아닌 연기를 하게 된다.

그 다음날부터 현아에게 매일 화분이 하나씩 배달된다. 보낸 사람 이름도 없고 100부터 거꾸로 카운트 되는 숫자 쪽지만 담겨 있는 미스터리한 화분.



2005년 최고 인기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을 연출한 김윤철 PD의 단막극이다. 처음 봤을 때 완전 감동 받아서 내 마음속 명작 리스트에 올려놓았던 작품인데 이십 여년 만에 다시 보니 흠........

선재 캐릭터가 이렇게 청승 맞게 느껴질 줄이야. 처음부터 현아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게 너무 미안한 건 알겠으나 자신을 위해 수화까지 배우는 사람이면 사라지려 할 게 아니고 더 잘해줘야지~

마지막 장면에서는 물음표가 생긴다. 대본을 찾아보니 선재가 침묵의 세계에 빠져있는 상태라고 하는데, 현아가 그에게 머리를 기댔을 때 그 역시 살짝 움직이기라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는 선재와 현아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과연 언제 나올까 거기에만 초점이 가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놀랍기만 했다. 그런데 이제 다 아는 상태로 다시 보니 선재의 모습이 불만스럽게 느껴진다. 엔딩만 놓고 보면 현아가 선재를 혼자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다. 

다시 안 봤으면 마음 속에 애틋하게 남아 있었겠지만, 세월이 흘러 감상이 달라진 것을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만은 않다. 한편으로는 재밌기도 하다. 드라마는 그대로인데 내가 변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연보라색과 노란색 란타나 꽃이 어우러져 있다
출처 픽사베이

* 란타나 꽃이 나온다. 꽃 색깔이 일곱 번 바뀌어 '칠변화'로 불리기도 한다고. 꽃말이 '나는 변하지 않는다'.

2024-06-15

타인의 취향 - MBC 베스트극장 (김지우 이필모)


주인공 민주는 취재하러 간 곳에서 우연히 한 남자를 보게 된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2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산에 갔다 길을 잃은 민주는 동굴에서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남자가 비를 피해 들어왔다. 그는 민주의 신체 부위에 관심을 보이더니 급기야 야수로 돌변해버렸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그날의 충격에서 벗어나고 있었던 민주는 남자를 본 뒤로 일상이 멈춰버린다.


주인공 민주가 약물을 주사기에 담고 있다
강민주 역의 김지우 /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 625회 '타인의 취향'

: 2006. 01. 14 방영. 소현경 극본. 유정준 연출. 김지우, 이필모, 박호영, 윤성훈, 이대연, 윤주영 등 출연.


준수한 외모를 가진 남자는 은행에서 일하는 유진이었다. 민주는 그의 동선을 파악해 일부러 자꾸 마주친다. 유진은 민주에게 관심을 보이고 민주도 그에게 관심 있는 척한다. 그 와중에 민주의 상처에 대해 알게 된 애인은 감당하지 못하겠다며 떠나버리고, 민주는 유진에게 복수할 준비를 한다. 그리고 비 예보가 뜬 날 그와 함께 산에 간다. 

2004년 경남 밀양에서 집단 성폭행 사건이 있었다. 가해자가 40명이 넘고 관련자만 100명이 넘는 초유의 사건인데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묻혀버린 사건이 20년이 지나 수면 위로 다시 떠올랐다. 신상이 폭로된 몇 명의 가해자들은 역시나 잘 처먹고 잘 살고 있었다. 이제 법으로는 그들을 또 벌할 수 없고 이렇게라도 단죄를 받게 된 것이 진심 쌤통이다.

성폭력 희생자의 사적 복수. 밀양 사건 관련 뉴스를 보면서 이 단막극이 떠올랐다. 물론 살인은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법으로 전혀 다스릴 수 없는 상황이라면? 법의 심판을 받았다 해도 그 형량이 터무니없이 가볍다면? 나와 전혀 관계없는 희생자의 복수도 대신 해주고 싶을 때가 있는데 심지어 내가 그 당사자라면? 마음이 오죽할까.



유진이 자신의 본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대사가 있다. "완벽하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때, 이기적인 본능에 충실할 때 그때 받는 쾌감이 얼마나 큰 줄 알아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희생시키는 범죄자의 심리가 이렇지 않을까? 민주는 그에게 답한다. "이때까진 그래본 적이 없는데, 이제부턴 그래봐야겠네요"라고.

민주는 문제의 그 동굴에서 유진에게 원수를 갚아준다. 사람을 죽이는 과정이 나오는데도 별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통쾌하기까지 하다. 엔딩에는 모짜르트의 레퀴엠 '라크리모사(Lacrimosa)'가 깔린다. 레퀴엠은 죽은 이를 위한 미사에 쓰이는 곡으로, 이 드라마에서는 유진의 안식이 아닌 한때 영혼이 죽었던 민주를 위한 선곡이라 생각하고 들었다. 산봉우리에 위태롭게 서있던 민주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까. 


포르테 디 콰트로 '라크리모사'


* 같은 제목의 프랑스 영화가 유명하다. 솔직히 이 화의 내용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 성범죄에 유독 관대한 우리나라의 양형 기준이 올라가길 바라 본다.

2024-06-07

비행접시 - MBC 베스트극장 (이세은 공유)


기진은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이야기를 수집해 MBC 라디오에 보내는 게 취미이다. 라디오 프로 PD와 진행자는 그를 '자판기'라고 부르며 학을 뗀다. 이름을 바꿔가며 사연을 주야장천(주구장창) 보내기 때문이다.


🛸 스포일러 주의. 줄거리 나옵니다 🛸

배우 이세은 얼굴 클로즈업
세희 역의 이세은

MBC 베스트극장 제 533화 비행접시


: 2003. 05. 09 방영. 박형진 극본. 임태우 연출. 이세은, 공유, 지상렬, 정민(우정출연), 김용희, 정호근, 서권순,신동미, 유준석, 김소현, 신동호 등 출연.


하루는 사연의 주인공과 바로 전화 연결을 했다가 사고가 난다. 기진이 '상품 타려 지어낸 사연'이라고 말한 게 그대로 방송을 탄 것이다. 이 프로의 작가인 세희는 기진에게 개인적으로 편지와 선물을 보낸다. 이제 상품을 줄 수 없으니 더 이상 장난하지 말아 달라고. 

너무 해맑은 청년 기진은 유에프오(UFO/미확인 비행 물체)에 심취해있다. 미국 드라마 '엑스파일'의 주인공 멀더처럼 외계인이 여동생을 데려갔다고 믿고 있다. 세희도 애인이 실종된 지 한참 되었다. 생사도 모르고 소식이 오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상태이다. 두 사람은 엽서를 주고 받으며 순수하게 마음을 나눈다. 

기진은 비행접시가 잘 찾아올 수 있도록 착륙장을 꾸몄다가 경찰서에 가게 된다. 보다 못한 그의 형이 여동생의 행방에 대한 진실을 똑똑히 알려준다. 세희 역시 애인의 행방에 대해 알게 된다. 그는 세희를 버린 게 아니었다.

나란히 붙어 선 버스 안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공유와 이세은
MBC 베스트극장 비행접시

그러고 보니 전도연, 한석규 주연의 영화 '접속'이 떠오른다. PC통신 붐이 한창 일어났을 때 온라인으로 소통하던 여인2와 해피엔드. 영화에선 한석규가 라디오 피디였었지 아마.... 

진실은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지만 기진과 세희에게는 결국 평화를 주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선가 나도 모르는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 소싯적에 라디오 프로에 꽤 참여했었는데, 이 작품에서처럼 사연자와 방송을 곧바로 연결하는 일은 없었다. 작가 분이 이런 저런 주의 사항을 알려주고 전화를 미리 연결해 놓는다. 비슷한 경우라면 진행자 겸 피디였던 김기덕 DJ가 노래 한 곡 틀면서 청취자에게 전화해달라고 하고는 노래 끝난 뒤에 바로 연결했던 것 정도? 물론, 청취자가 생방송에서 상식 밖의 말을 하는 것까지 제작진이 어떻게 할 수는 없다. 

* 극장씬에서 '원령공주'가 나온다. '볼링 포 콜럼바인' 포스터도 보인다. 2003년 촬영 인증.

* 공유 주연의 넷플릭스 드라마 '트렁크' 기대중.

2024-06-03

하마 - MBC 베스트극장 (이지은 김유석 반효정)


같은 은행에서 일하는 진수와 영미는 다른 직원들 모르게 은밀히 만나고 있다. 진수는 엄마가 진 빚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영미는 결혼하고 싶지만 진수가 말을 꺼내지 않아 답답하다.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이지은이 거울 속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고 이지은 /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 317화 하마


: 1998. 06. 12 방영. 하명희 극본. 최창욱 연출. 김유석, 이지은, 반효정, 이정훈 등 출연.


진수의 엄마는 아들이 영미와 사귀는 것을 몹시 반대한다. 아들 몫으로 집을 마련해뒀었는데, 진수가 이 집을 처분해 영미 엄마의 병원비에 보태버린 것이다. 오로지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아왔던 진수의 엄마는 아들이 영미와 계속 만나는 게 용납이 안 된다.

채권자들이 은행으로 진수를 찾아오자 상사는 그에게 경고를 준다. 이 와중에 영미는 임신까지 하고, 빚을 해결하는 길은 멀기만 하다. 영미는 살던 전세를 빼서 그 보증금을 진수에게 건네며 더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한다.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형편 없는 데도 한결같은 영미를 보며 진수는 은행 돈을 빼돌리고 도망갈 계획을 세운다.



이 단막극이 유독 기억에 남은 건 19금(?) 뉘앙스 때문이었다. 주인공 두 사람이 모텔에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이 좀 나오는데 살색이 난무하지 않아도 꽤 야하게 느껴졌었다. 20여년 만에 다시 보니 첫 장면부터....🙄 그리고 의미를 모르겠는 제목도 그렇고. 다시 봐도 제목이 왜 하마인지 아리송하다. 아니, 진수는 길 떠날 때 데리고 갈 동물로 왜 하마를 골랐을까? 땅도 물도 다 갈 수 있는 동물이라서? 무게 때문에 물에 들어가면 가라앉는다는데 왠지 빚에 묶여버린 진수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화를 못 잊는 건 영미로 나온 배우가 이지은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지은하면 가수 아이유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땡그란 눈에 도톰한 입술이 돋보였던 그녀는 KBS 드라마 '느낌'에 등장하면서 단번에 주목을 받았다. 같은 PD(윤석호)의 연출작 '컬러-레드'에서는 새빨간 입술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그 이미지가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흔치 않은 외모와 독보적인 느낌을 가진 배우였는데..... 지금은 작품 속에서만 그녀를 만날 수 있다. R.I.P 이지은........

은행 관계자가 은행 자금을 횡령한 사건은 현재에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내가 이용 중인 은행에서도 몇 백 억 횡령 사고가 터졌었는데 액수에 비하면 아주 조용히 넘어갔다. 훔쳐간 돈도 얼마 회수 못한 것으로 아는데 아직까지 은행이 망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정도 돈은 없어도 되는 건지 뭔지.... 여튼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은행을 터는 건 망상이나 대리 체험으로 그쳐야 하겠다. 설령 털이에 성공했다 해도 마음에 거리낌 하나 없이 일상을 누릴 수 있을까? 처음부터 양심 없이 태어난 인간이 아니고서야 말이다. (생각은 이렇지만 진수와 영미의 탈출은 성공하기를 바랐다는 거....)

2024-04-30

내 인생의 네비게이터 - MBC 베스트극장 (조이진 이천희)


주인공 현수는 대학교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며 남의 가방을 훔친다. 하루는 어떤 남학생의 가방을 훔치는데, 그의 신분증을 보니 현수와 생년월일은 물론이고 이름의 한자까지 똑같았다. 현수는 지갑을 찾아주는 척하며 그에게 접근한다. 얘기를 나눠보니 둘 다 같은 작명소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현수가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이현수 역의 조이진

MBC 베스트극장 제 615화 '내 인생의 네비게이터' 


: 2005.03.18 방영. 김인영 극본. 이태곤 연출. 조이진, 이천희, 금보라, 이애정, 이한, 이옥정, 손영순, 한춘일, 서지승, 김현정 출연. 



현수는 어릴 적 사고로 부모를 잃고 고모 집에서 불청객처럼 살아왔다. 사고 보상금은 고모 부부가 사업한답시고 다 날려버려서 대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반면 남학생 현수는 법대생에 집도 잘 살고 긍정적이었다. 현수는 자신과 너무나 다른 그에게 양가감정을 느낀다. 

두 사람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고 친구 사이를 넘어 서로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현수의 사촌이 남자 현수의 가방을 매고 두 사람 앞에 나타나면서 연극은 끝이 난다. 현수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작별을 고한다. 하지만 남자 현수는 웃는 얼굴로 또 다시 현수 앞에 나타난다.

현수가 다른 현수를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다
또 다른 이현수 역의 이천희


2005년 방영 당시 (무슨 이유에서인지) 절반밖에 보지 못한 이 단막극을 이번에 다시 보았다. 와, 남자 현수가 현수에게 네비게이터가 되어주는 장면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 뒤로 이어진 반전과 현실적인 결말은 진한 여운까지 더해주었다. 이런 명작을 못 보고 지나쳤다니.... 이제라도 봐서 다행이다. 누가 이 작품 좀 영화로 리메이크 해주세요~

[엔딩 얘기를 쓰고 싶지만 제 리뷰를 보고 이 작품을 찾아 보시는 분이 혹시라도 있을까 해서 스포일러 자제합니다]

현수가 '20년 뒤에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독백하는 대사가 있는데, 신기하게도 이 작품을 다시 본 게 거의 20년 만이다. 말은 굉장히 긴 세월 같은데 돌이켜보니 언제 그렇게 다 흘러 가버렸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지만 20년 뒤의 내 모습을 상상해보니 답이 안 나와나와나와........😓😓😓



* 조이진 배우는 2016년 영화 '나를 잊지 말아요'에 출연한 이후 알려진 활동이 없다(보고 싶어요~). 이천희 배우는 전혜진 배우와 결혼해 딸을 두었고 연기 외에 개인 사업(수제 가구 및 캠핑용품 브랜드 운영)도 하고 있다. 책 '가구 만드는 남자' 관련 인터뷰 보기.

* 가방 주인의 남자친구로 나오는 배우가 누군가 했더니 김남길! 당시에는 '이 한'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20년 뒤에 당신은........

* 이상은의 명곡 '언젠가는'이 나오는데 가사가 이 작품과 너무 잘 어울린다.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 몇 시간 동안 리뷰를 쓰고 게시 버튼만 누르면 되었는데, 뭐 하나 수정하려다 글이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구글 블로그야 자동 저장 취소하거나 되돌아가는 기능도 있어야지! 방언처럼 터져 나오려는 쌍욕을 간신히 참으며 다시 썼다....🤬🤬🤬

2024-02-11

나비 - MBC 베스트극장 (류수영 조윤희)

루게릭병
: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LS/Amyotrophic lateral sclerosis). 야구선수 루 게릭이 투병하면서 알려지게 된 병. 알 수 없는 이유로 운동신경 세포가 손상되면서 근육에 힘이 빠져 서서히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말기에는 음식물을 삼키고 숨을 쉬는 것도 어려워진다.


두 남녀가 침묵 속에 앉아있다
MBC 베스트극장 '나비' 조윤희, 류수영

MBC 베스트극장 제567화 나비


: 2004.02.06 방영. 드라마 '다모' 팬픽-김인숙 원작. 손은혜 극본. 이재규 연출. 류수영, 조윤희, 김정학, 유지인, 김갑수, 박준희, 서대한, 김소영 출연.

🦋 스포일러 심합니다 주의하세요 🦋

지원은 자신이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사이자 오빠인 현수는 지원에게 더욱 신경을 쓴다. 사실 두 사람은 친남매는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현수의 아빠가 여자아이를 집에 데려왔다. 그날부터 아이는 현수의 동생이 되었다.

집안에 먹구름이 낀 것은 지원이 누구의 자식인지 밝혀지면서부터다. 지원은 현수 아빠가 과거에 사랑했던 여자의 딸이었던 것. 남편 친구의 딸인 줄로만 알았던 현수 엄마는 지원을 집에서 내보낸다.



졸지에 버림받은 지원은 음악에 더욱 매달린다. 그리고 현수의 친구와 결혼까지 한다. 현수는 애인이 있었지만 마음을 주지 못하고 결혼을 계속 미룬다.

지원은 다시 혼자가 되고, 현수는 누구보다 지원을 챙겨주며 곁에 있으려 한다. 엄마에게서 현수를 놓아달라는 말을 들었던 지원은 현수를 밀어낸다. 하지만 현수는 더 이상 마음을 접지 못하고 꾹꾹 눌러왔던 진심을 토해낸다. 가족으로써가 아닌 지원을 사랑한다고......


MBC 드라마 '다모'는 시청률이 높지는 않았지만 숱한 폐인을 만들어낸 저주받은 걸작이다. 팬픽도 많이 나왔었는데 그 중 한 작품을 다모 연출자인 이재규 PD가 직접 단막극으로 만든 것이 '나비'이다. 결말만 보아도 지독하게 비극이다. 다모에 이어 그 파생작까지 비극으로 만들다니 너무했다 싶기도 하다.

사고난 차에서 피 묻은 주인공의 손
MBC 베스트극장 '나비' Sad Ending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의 러브스토리는 이제는 너무 흔해져서 별 감흥도 없지만, 유독 이 작품이 기억에 남은 건 엔딩이 충격적이어서다. 서로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으나 바로 얼마 뒤에 쾅. 현수가 지원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뻗지만 못 잡고 힘이 빠진다. 햐, 감독님 너무하네. 그들에게 남은 시간은 더 이상 없어 보이는데 손이라도 잡게 해주시지. 철저히 가혹해서 더 기억에 남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엔딩에 깔리는 노래가 너무 처연해서 찾아보니 이런 가사가 있다. But let them say whatever they will I love my love with a free good will. 그들이 뭐라 하든 나는 내 사랑을 계속할 거예요. 가수와 곡 제목은 Meav의 One I Love.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어디에선가 힘든 사랑을 하고 있는 분들을 응원해본다(단, 불륜 빼고). 사랑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 인생 전부를 걸기도 하는 것일까? 모른다.... 모르겠어.......



* 동생 먹인다고 열심히 요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류수영의 셰프 기질이 엿보이는 듯하다.

류수영이 요리를 하고 있는 드라마 장면
MBC 베스트극장 '나비' 류수영의 요리 장면



* 조윤희가 주연한 영화 '동거, 동락'을 좋아했다. 개봉 당시 김동욱의 팬이어서 dvd까지 산 것인데, 조윤희의 연기가 좋았다. 지금은 본지 너무 오래 되어 스토리도 생각 안 날 지경이지만. 찾아보니 설정이 이 단막극과 통하는 점이 있다. 

* MBC 드라마 '환생-NEXT'에서 류수영이 몽골 장군 카사르로 나온 고려 편만 보았었는데, 고려 기생 자운영(박예진)과의 사랑 이야기가 너무 애절해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방영 당시 이 커플에 대한 인터넷 반응이 아주 뜨거웠었다. 


2023-12-05

가면의 꿈 - MBC 베스트극장 (남성훈 윤예희 한석규)


대기업 이사 탁명식(남성훈)은 가발과 콧수염으로 변장을 하고 거리를 돌아다닌다. 궁극적으로 가는 곳은 어느 포장마차. 젊은 여자 혜란(남나경)이 꾸리는 곳으로 명식은 그녀의 어린 동생들도 잘 챙겨주고 있다. 하루는 포장마차에서 혜란과 어떤 남자가 실랑이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출근길에 그 남자가 같은 회사 직원 양창수(한석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이 얼굴에 가면을 대 보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가면의 꿈' 남성훈

MBC 베스트극장 117회 가면의 꿈


: 1993.12.24 방영. 원작 이청준. 최순식 극본. 최용원 연출. 남성훈 윤예희 한석규 장인환
허윤정 한태일 정태섭 남나경 장송미 김경애 강인덕 정한헌 백승철 배인혜 최범호 최종환 
홍보경(아역) 홍상진(아역) 출연.


명식이 변장에 취미를 갖게 된 건 부부 동반 가면무도회에 다녀온 뒤부터 였다. 부인(윤예희)은 기묘한 취미에 빠진 남편이 마음에 걸리면서도 내버려둔다. 남편이 밤에 나갔다 온 날에는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침대에서도 뜨거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식은 포장마차를 찾아갔다가 혜란이 한강에 투신해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창수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한다. 고학생으로 해외개발팀 수석 연구원이 된 대단한 인물. 성실하고 유능한 직원. 혜란과 깊은 사이면서 태산그룹 외동딸과 사귀는 사이. 

창수는 경찰(강인덕)에게 자신은 결백하다며 포장마차에서 본 콧수염 남자가 수상하다고 말한다. 혜란이 자살했다는 것을 믿지 않는 명식은 사건 현장을 한참 파헤치다 증거가 될만한 것을 찾아낸다. 그리고 해고된 것을 항의하는 창수에게 일요일날 회사로 찾아오라고 말한다.


일요일이 되고, 명식은 변장 도구를 챙겨서 회사로 간다. 부인은 친구(허윤정)와 함께 그의 뒤를 밟는다. 명식은 변장한 모습으로 창수를 맞이한다. 고학생으로 대기업에 들어가 사장 딸과 결혼한 그였기에 창수의 심리를 꿰뚫어 본다. 창수는 명식의 추리를 듣다가 범행을 인정하는 말을 내뱉는다. 그때 대기하고 있던 경찰이 모습을 드러내고 창수가 끌려 나간다.

이 단막극의 압권은 바로 이 부분이다. 창수는 호락호락 물러가지 않고 엄청난 사실을 폭로한다. 명식이야말로 사장 딸과 결혼하기 위해 혜란의 언니를 버렸다는 것. 혜란의 언니는 명식의 자식을 낳았다는 것. 혜란이 죽은 언니를 대신해 조카를 동생으로 키우고 있었다는 것. 명식의 가면이 무참하게 벗겨지는 순간이다. 또한 그가 왜 새로운 가면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는지 바로 이해가 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명식은 창수의 가면을 벗겨냈지만 그것은 곧 명식의 가면이었다. 

🎭사🎭족🎭


* 처음엔 명식이 포장마차 주인에게 흑심을 품었나 했는데 실은 어렵게 사는 옛 애인의 가족을 챙겨주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동생들 중 한 명이 자기 자식인 것은 몰랐다. 마지막 장면에는 그 애들을 데려와 함께 사는 듯한 암시가 담겨 있다. 솔직히 부인이 보살&천사 같다는 생각만 든다.😓

* 드라마를 보고 나서 원작 소설 줄거리를 찾아보고 깜짝 놀랐다. 주인공의 성장 배경과 변장을 즐긴다는 설정 말고는 같은 게 없었다. 소설 속 주인공의 직업은 판사이고 결말도 완전히 다르다. 소설을 모티브로 새로 지어낸 수준이다. 이 베스트극장을 보고 소설 읽은 척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명심하세요.

왼쪽부터 한석규 윤예희 허윤정
MBC 베스트극장 '가면의 꿈' 한석규/윤예희/허윤정

* 한석규 배우의 목소리와 발음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좋은 목소리에 발음이 또렷하고 강약이 분명해서 듣고 있으면 귀가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 윤예희 배우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 친구로 허윤정 배우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 남성훈-윤예희-한석규 세 배우의 조합이 신기하다. 


2023-11-04

사랑한다면 그녀처럼 - MBC 베스트극장 (남주희 손현주 임호)


29년을 살아오면서 연애 한번 못한 주인공 남희. 중병에 걸리자 지금까지 못해본 것들을 해보기로 결심한다. 제일 먼저 그녀가 한 일은 3개월 동안 애인 노릇 해줄 남자를 구한 것.


남희와 성준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사랑한다면 그녀처럼' 남주희 손현주


MBC 베스트극장 제288회 '사랑한다면 그녀처럼'


: 1997. 10.17 방영. 구선경 극본. 오경훈 연출. 남주희, 손현주, 임호, 강성연, 김기현, 이재훈, 이은철 등 출연.

방영 당시 재방송을 본 것 같은데 그마저도 중간부터 보았었다. (지금이야 웨이브에서 얼마든지 베스트극장을 볼 수 있지만) 다시 볼 방법이 없었던 시절엔 한번 보고 싶어지면 어찌나 안달이 나던지 유독 이 화가 그랬었다. 근 25년 만에 다시 보니 이럴 수가. 남희가 너무 불쌍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드라마 속 그녀는 누구보다 결단력 있고 강단 있는 캐릭터였다. 만약 다시 보지 않았다면 남희를 그저 바보 같고 가련한 여자로만 계속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진상들을 견디며 사는 은행원 남희(남주희)에게 그나마 낙이 있다면 짝사랑하는 남자 성준(손현주)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룸메이트의 애인이다. 속물 같은 친구는 양다리를 걸치고, 위암 선고를 받은 남희는 성준에게 마음이나 고백해보려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친구가 나타나 그를 다시 차지하고, 체념한 남희는 외모가 괜찮은 기훈(임호)을 고용해 가상 연애를 시작한다.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유흥을 즐기던 기훈은 처음엔 봉 잡았다고 좋아하지만 점점 남희의 순수함에 끌리게 된다. 그러던 중 남희는 진짜 솔로가 된 성준과 가까워지게 되는데.......

이 극에서 무엇보다 눈에 띈 것은 '녹색'이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좋은 감정의 신호를 '그린 라이트(green light)'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이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2013년에 방영한 연애 상담 프로그램 '마녀사냥'의 영향이라고 한다(위키백과). 뭐 그렇다고 2013년 이전엔 녹색에 아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재 쓰이는 '그린라이트'와 상통하는 의미로 녹색이 극에 등장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남희와 기훈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사랑한다면 그녀처럼. 남주희 임호

남희가 성준에게 건네는 머그컵에 녹색이 들어있다. 성준이 좋아하는 카페의 이름은 그린 위치. 남희와 함께 쓰는 성준의 우산 색깔도 녹색이다. 남희에게 진심이 된 기훈이 입고 있는 재킷의 색깔도 녹색. 이쯤 되면 기훈의 스포츠카와 남희가 그를 처음 만난 날 입은 옷의 색깔이 붉은색인 게 우연은 아닌 것 같다.



누구나 사는 동안에 한 번
잊지 못할 사람을 만나고
잊지 못할 이별도 하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사람을 사랑한다는 그 일
참 쓸쓸한 일인 것 같아

-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중에서

남희의 연애 버킷 리스트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있었다. 그녀가 이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정작 사랑 따위에 질색하던 기훈이었다. 사랑을 포기한 남희가 스스로를 동정하듯 부르는 노래에서는 쓸쓸함이 짙게 묻어난다. 남희가 '잊지 못할 사람'을 생각하며 노래하는 동안 기훈은 '잊지 못할 이별'을 하고 성준은 '잊지 못할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 이 화에서 가장 압권이다.

리뷰를 쓰다 보니 남희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좋아한 것은 기훈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남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저 행복해졌기만을 바라 본다.


* 기존 리뷰 중에 여주인공이 죽는다는 식으로 써놓은 게 있었다. 드라마를 보긴 한 걸까?
*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줄 알고 하고싶은 거 다 해보다 인생이 좋게 풀리는 내용의 영화 '라스트 홀리데이'도 추천해본다.



한 잎의 여자 - MBC 베스트극장 (김현정 천정명 이영호)


베스트셀러극장이 베스트극장으로 바뀌어도 MBC 단막극의 명성은 계속 이어졌다. 베스트셀러극장은 반드시 '원작'이 있어야 했다는데 베스트극장에선 그 굴레를 벗은 것이다. 단막극은 신인들의 등용문이자 무대였다. MBC가 드라마 왕국으로 군림할 때 베스트극장도 성했던 게 우연만은 아닐 텐데. 들인 비용에 비해 시청률이 낮으니(요즘말로 가성비가 Hell) 현재 공중파 TV 채널에서는 특집극을 제외하고 단막극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옥희의 머리에 붙어있는 나뭇잎을 떼어주는 손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486회 한 잎의 여자


: 2002. 4.12 방영. 고동선 연출. 신경희 극본. 김연희 윤색. 김현정, 천정명, 나문희, 이영호, 양택조, 이세은 출연.

'한 잎의 여자'하면 오규원의 시가 먼저 떠오른다. 시를 읽어보면 왠지 연약하고 순수한 여자가 연상되는데 화자의 시선에선 슬픔이 가득 느껴진다. 이해가 안 가는 표현도 있지만 시인은 고인이 되신지 오래라 물어볼 수가 없다. 아무튼 같은 제목의 베스트극장 주인공 옥희는 시 속의 여자와 닮은 느낌이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 스포일러 심합니다. 주의하세요 ===

옥희는 스물두살이지만 정신 연령은 열 살 정도에 머물러 있다. 엄마가 기차선로에서 놀고 있던 옥희를 밀쳐내고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 트라우마로 옥희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다행히 좀 사는 동네 아주머니가 옥희를 거둬 키워줬지만 옥희가 좋아하는 그 집 아들 성재는 옥희의 몸만을 탐할 뿐이다.

어느 날 동네에 봉수가 나타난다. 가겟집 아들인데 성재와 다투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 길로 고향을 떠나 조폭 막내 노릇을 하다가 상대 조직의 보스를 찌르고 집으로 도망 온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옥희가 그의 상처에 관심을 가져준다. 계산할 줄 모르고 천진난만한 옥희가 자꾸 그의 눈에 들어와 밟힌다.


봉수가 옥희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

봉수는 자신을 만나러 온 조폭 동료가 옥희를 끌고 가자 필사적으로 따라가 구해낸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다. 옥희의 오빠는 성재에서 봉수로 바뀐다. 봉수는 옥희를 지켜주고만 싶다. 하지만 이들을 둘러싼 현실은 가혹하기 그지없다. 옥희는 자신이 아이를 가진 것도 모른다. 봉수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약속된 돈을 받고 상대 조직의 보스를 다시 죽이려 하다가 쫓기게 된 봉수는 옥희가 보고 싶어 하는 바다로 함께 도망을 가려 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봉수를 쓰러뜨린 것은......




사실 20년 전에 본 기억만으로 리뷰를 쓰려고 했었다(여기는 드라마 기억 저장소니까). 한데 쓸만한 이미지가 없어서 캡쳐도 할 겸 다시 보다가 내 기억과 다른 게 많아서 깜짝 놀랐다. 옥희를 키워준 아주머니로 나온 배우가 김영옥 님이 아니라 나문희 님이었다. 마지막 장면도 옥희가 오빠를 부르면서 어딘가를 헤매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작 극에서는 옥희가 기차 플랫폼에 쭈그려 앉아 숫자를 세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르게 기억할 수가 있을까?


죽어가는 봉수와 봉수를 기다리는 옥희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

가장 깼던(?) 부분은 죽었다고만 생각한 봉수가 부감으로 잡은 장면에서 움직인 것이다. 아, 여운 바사삭! 그래도 얻은 게 있다면, 지금까지 옥희가 너~어무 불쌍했었는데 봉수가 살았을 수도 있으니 이 비극적인 커플에게 희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다시 보아서 뭔가가 사라졌지만 또 뭔가가 생겼다. 쌤쌤(same same). (아직 안 보신 분께는 강력 추천! MBC 베스트극장은 웨이브에서 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옥희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

실제로도 영혼이 맑아보이는 김현정 배우의 근황을 찾아보니 화가로 활동 중이었다. WOW! 천정명 배우는 2022년 6월에 주짓수 최고 레벨인 블랙 벨트를 받았다고 한다. WOW! 두 배우가 극에서 얼마나 풋풋한지 젊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아역배우 박은빈-이재응-이세영
MBC 베스트극장 한 잎의 여자. 웨이브 캡처/다음이미지

* 박은빈 배우가 옥희의 아역으로 나온다. 깜놀! 가게에서 과자 훔치는 아이가 있었는데 얼굴을 보니 아역 배우 시절 연기 잘하기로 이름났던 이재응이다. 이세영 배우와 함께 나온 KBS TV문학관 '소나기'에서 소년 역을 했었다.

* 나쁜 오빠 성재 역의 이영호 배우가 쓴 '한 잎의 여자' 촬영 일기가 있다.
https://www.imbc.com/broad/tv/drama/best/best_note/1315669_2629.html

* 고동선 PD의 인터뷰를 보니 자신이 연출한 단막극 중에서 '한 잎의 여자'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2023-11-03

나나, J를 만나다 - MBC 베스트극장 (신지수 정찬)


열일곱 살의 가출 소녀 나나와 서른 살의 부랑자 J(제이).

나나는 성인 행세를 하며 조건만남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J도 그렇게 만나게 되었지만, 그는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과는 다르게 나나가 미성년자인 것을 알고는 거절한다. 영양실조로 쓰러진 나나를 차마 외면하지 못한 J는 보호자처럼 나나를 계속 챙겨주게 되고. 나나는 찔러보는 심정으로 임신 중절 수술비를 빌려달라고 하는데 J가 정말 돈을 마련해준다.


제이가 나나를 위로하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나나 J를 만나다.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526회 나나, J를 만나다


: 2003. 3. 14 방영. 신현창 연출. 박정화 극본. 정찬, 신지수, 김용희, 구혜령 출연.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나가 병원에 같이 가 달라는 부탁까지 하자 J는 내가 아이 아빠냐며 성질을 부린다. 그래놓고는 수술이 끝날 때까지 나나를 기다린 것도 모자라 자취방에 데려와 미역국을 끓여준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인간적인 대접에 나나는 펑펑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점점 마음을 열게 되는데......

당시 방영이 끝나자마자 MBC 베스트극장 시청자 게시판을 들여다보았는데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두 사람이 이루어지는 2탄을 꼭 만들어 달라고 요청이 줄을 이었다. 나도 같은 의견을 보탰었다.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이 재회하는 장면을 상상하며 스토리를 지어보기도 했다. 그 어떤 화보다 여운이 정말 오래갔었다.

나나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가 뒤를 돌아본다
MBC 베스트극장 나나 J를 만나다. 웨이브 캡처

한데 근 20년 만에 다시 보니 예전과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기를 그렇게 바랐었는데, 지금은 두 사람의 차이가 더 부각되어 보인다고 할까? 13년이나 되는 나이 차이도 그렇고, 제법 사는 집 딸인 '찬주(나나)'와 새 삶을 살기 위해 정처 없이 떠난 '준(J)' 사이에 예상되는 현실적인 문제들이 괜히 상상이 된다. (다시 보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만약 소원대로 2탄이 나왔었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드라마로 남을 수 있었을까? 희망 없던 두 사람이 만나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쌍방 구원 서사물 중에서는 강력하게 추천할만한 작품인데 결말이 확실히 지어졌었다면 과연...?

- 추억의 드라마를 다시 보고 감상이 변하는 걸 느끼는 게 그다지 좋지가 않다. 생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옛 감상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이별의 왈츠 - MBC 베스트극장 (우희진 지진희)


야구를 그만두고 택시기사를 하고 있는 신기태. 어느 날 과거에 잠시 만났던 구민정을 승객으로 맞이하고 반가워한다. 하지만 구민정의 표정은 좋지가 않고. 급기야 그녀는 기태의 아이를 낳았다고 폭탄선언을 하는데...!

택시기사 지진희와 승객 우희진
MBC 베스트극장 이별의 왈츠. 지진희, 우희진. MBC 공식홈


MBC 베스트극장 542회 이별의 왈츠


: 2003. 07. 11 방영. 이정선 극본. 신현창 연출. 우희진, 지진희, 남상훈, 김철기, 임승대, 이영희 출연.



이 화도 정말 재밌게 봤었는데 제목을 기억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찾고 보니 제목이 왜 '이별의 왈츠'인지 모르겠다. 짧게 만났다가 흐지부지 관계가 끊겨버린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얘기니까 왈츠를 긍정적인 의미로 보면 되겠지만, 그럼에도 제목과 내용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만 든다. 이별의 왈츠라고 하면 왠지 헤어지는 일만 남은 연인이 떠오른다고 할까?

------ 스포일러 주의 ------

아무튼 20년 만에 다시 보고 나니 처음 봤을 때와는 감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또다시 느꼈다.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결혼하려는 구민정을 보니 이거 완전 사기 결혼이잖아~ 소리만 나온다. 아무리 아이를 친부한테 맡긴다 해도 직접 낳은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데 이걸 배우자 될 사람에게 밝히지도 않고 결혼이라니 Oh No~~~

그런 구민정의 심리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만약 이런 일을 겪는다면? 이건 무조건 결별이다. 믿음 없는 사람과 어떻게 평생을 같이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구민정이 자기 자신만 아는 캐릭터는 아니지만(그랬다면 인생의 걸림돌이 될 아이를 어떻게든 안 낳았을 듯), 신기태가 워낙 바보같이 착한 캐릭터이다 보니 구민정이 더 이기적으로 보이긴 하다. 결국 구민정의 마음을 돌리게 만드는 것은 신기태의 사려 깊은 마음씨. 정혼자가 그녀의 아이를 자기 자식처럼 키우겠다고 했음에도 구민정은 조건을 쫓던 자신을 벗어던지고 신기태에게로 간다. Happy Ending~

지진희,우희진,남상훈
MBC 베스트극장 이별의 왈츠. 지진희, 우희진, 남상훈. 웨이브 캡처

부드러운 미소가 매력인 지진희와 조각 같은 외모의 우희진, 너무나 귀여운 남상훈 아기까지.. 내용도 내용이지만 보는 눈이 즐거운 작품이었다. 아기는 이제 20대 청년이 되었겠구나. 세월 참.

* 비슷한 설정으로 SBS 드라마 '온니 유'가 있다. 조현재, 한채영이 아주 잘 어울렸었다.



그날의 분위기 - MBC 베스트극장 (김창숙 신윤정 김응석)


여성이 원나잇 스탠드로 임신을 하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아기의 생물학적인 아빠와 무조건 결혼? 낙태? 비혼모로 살아가기? 물론 생명은 소중하다. 하지만 여성의 인생도 소중하다.


연극부 후배 신윤정에게 연기를 지도하는 최종환
MBC 베스트극장 '그날의 분위기'

MBC 베스트극장 제153화 '그날의 분위기'


: 1994.09.30 방영. 조명주 극본. 강병문 연출. 김창숙, 신윤정, 전무송, 김응석, 최종환, 하미혜, 윤익희, 원지선, 김현석, 박희정, 강수영, 최범호, 최정미, 고용화, 유영재, 이은주 출연.



이럴 수가... 이 극의 주인공을 한혜진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신윤정! 하긴 1994년에 한혜진 배우는 미성년자였을 텐데. 각설하고, 오랜만에 신윤정 배우를 보니 몹시 반가웠다. 아울러 이 극이 이렇게 앞서간 내용인 것에 새삼 놀랐다.

===== 스포일러 주의 =====

주인공 지인(신윤정)은 대학교 연극부 활동에 열심이다. 그의 엄마 은숙(김창숙)은 비혼모를 돕는 봉사활동에 열심이다. 지인에게는 남자친구 석현(김응석)이 있는데 아직 깊은 사이는 아니다. 은숙은 비혼모들을 늘 보다 보니 딸이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신경이 많이 쓰인다.

연극부에서 락카페에 간 날 지인은 준호(최종환)와 끝까지 남게 된다. 준호는 연출을 담당하는 선배로 지인은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되어 있는 상태였다. 지인은 새벽에야 집에 돌아오고, 은숙은 밤새 딸을 기다렸지만 그냥 넘어간다. 그리고 어느 날, 은숙은 청소를 하다가 임신테스트기를 발견하고는 딸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길로 당장 석현을 찾아가 결혼 얘기를 꺼내고. 날벼락을 맞은 석현은 배신감에 분노하지만 지인에게 얘기를 다 듣고는 조용히 이별을 고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원나잇 스탠드를 한 딸을 이해 못 하는 엄마는 준호와 결혼하라 하고 딸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할 수 없다며 자신의 일에 그만 개입하라고 일침 한다. 은숙이 생명 소중론자가 된 것은 사실 결혼 전에 낙태를 한 적이 있어서였다. 봉사활동도 그 속죄의 일환인데, 막상 딸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나니 이론과 현실의 차이가 크게 느껴져 혼란에 빠진다.

크게 갈등하던 두 사람은 결국 병원을 찾게 되고, 뜻하지 않게 신생아실 아기들을 보게 된 지인은 마음이 흔들린다. 서로 끌어안고 괴로워하는 엄마와 딸. 과연 그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만일 내 문제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글쎄, 닥쳐보기 전에는 나도 모르겠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극이 만들어진지 30년이 흘렀지만 앞으로 30년, 아니 그 이상이 흘러도 이 문제는 정답이 없는 화두로 남을 것이다. 생명과 현실 어느 쪽을 더 중요하게 여길지는 개인 각자마다 다를 테니까 말이다. 다만 법으로 이거 안 돼 저거 안 돼 정해버리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 몸 상태에 대한 결정을 나 말고 누가 내릴 수 있다는 말인가?


산부인과에서 엄마가 딸을 안아주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그날의 분위기'


* 비디오방, 락카페, 무기 같은 무선 전화기, 각이 살아있는 그랜져가 눈에 띈다.

* 지인의 가족이 간 레스토랑은 베스트극장 '쇼팽의 손'에도 나온 곳이다.

* 신윤정 배우 근황을 찾아보니 성형외과 의사와 결혼해서 잘 사신다고 한다.

* 같은 제목의 영화도 있다. 문채원 배우가 예쁘게 나온다.



2023-10-29

쇼팽의 손 - MBC 베스트극장 (김서라 나한일)


드라마 시작부터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숨가쁘게 흐른다. 밤길을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는 드뷔시의 달빛과 함께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하지만 곧 쇼팽의 프렐류드 24번(Chopin prelude op.28 no.24)으로 바뀌면서 누군가의 손이 여자의 목으로 향한다. 그리고.

김서라, 나한일
MBC 베스트극장 쇼팽의 손. 김서라, 나한일.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39화 쇼팽의 손


: 1992. 4. 12 방영. 이종학 원작. 김남 극본. 강병문 연출. 나한일, 김서라, 임문수, 박상규, 김경숙, 박주미, 박현심, 이도련, 최선균, 이효신, 김민석, 신동욱, 한석규, 김현숙, 윤진숙 출연.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경치 좋은 강가에서 유명 피아니스트가 사망한 채 발견된다. 장례식에 참석한 음악잡지 기자 수진(김서라)은 그곳에서 떠오르는 평론가 경태(나한일)와 처음 인사를 나눈다. 부와 명예, 외모까지 가진 그가 솔로라는 사실에 수진은 그에게 급 관심이 간다. 두 번째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수진은 취재를 갔다가 두 피해자 사이의 공통점을 알아챈다. 특정한 피아노 콩쿠르의 입상자라는 것. 놀랍게도 수진 역시 출전해 상을 탔던 대회였다. 그 와중에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나고 그 피해자 역시 콩쿠르 입상자인 게 밝혀지는데......

내용과는 별개로 쇼팽의 음악이 많이 나와서 보는 동안 귀가 즐거웠다. 드뷔시의 달빛이 생뚱맞게 느껴지긴 하지만 경태에게 의미가 큰 곡이니 패스. 손을 잃고 피아노를 잃고 인생을 잃은 자의 복수극. 군데군데 허술함을 빼면 소재와 스토리는 참 매력적이다. 다만 극 마지막에 나오는 명언은 안 넣었으면 좋았을 것을. 누구는 누군가의 장난으로 모든 것을 잃었는데, 이 명언은 왜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해내지 못했냐고 탓하는 것 같아서다. 쇼팽이 손을 다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훌륭한 작곡가가 되었다지만, 모두가 그렇게 쇼팽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찰스 램의 명언
MBC 베스트극장 쇼팽의 손

* 한석규가 피해자의 가족으로 잠시 나오는데 목소리와 발음이 너무 좋아서 단박에 튄다.

* 최선아 배우와 많이 닮아보이는 배우가 나온다. 성함이 김현숙 맞을까? 1991년 MBC 20기 공채 탤런트라고 하시니 맞을 수도.




- 쇼팽하면 쇼팽 콩쿠르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우승한 조성진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2016년 Beirut Chants Festival에서 연주한 Chopin prelude op.28 no.24 영상은 강력 추천! (03:15부터)



조성진이 연주하는 드뷔시의 달빛





따뜻한 겨울 - MBC 베스트극장 (박순애 최민수 신진희)


가진 것은 없지만 오손도손 살고 있던 부부에게 비극이 들이닥친다. 희망이 없는 부부는 어린 딸을 데리고 죽음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박순애와 최민수
MBC 베스트극장 따뜻한 겨울. 박순애, 최민수. 영상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19화 '따뜻한 겨울'


: 1991.11.17 방영. 신선희 극본. 이은규 연출. 박순애, 최민수, 신진희(아역), 이도련, 김정, 홍성선, 서영애, 이상철, 정인석, 유준석 출연.



베스트셀러극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 있었다. 한 가족이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을 빌려 신기한 듯 구경한다. 엄마는 애들을 재우고 아빠는 연탄인지 뭔지로 연기를 피워놓고 가족 옆에 눕는다. 그러다 누가 들어왔던가 아니면 부부의 생각이 바뀌었던가 해서 다급히 환기를 시키는데.......

베스트극장 리스트에서 '따뜻한 겨울'을 발견하고 옳다구나! 하고 좋아했더니 아니었다. 비싼 호텔방을 빌려 하룻밤 자는 것만 똑같았다. 설마 기억이 왜곡되었나? 아닌데. 가족이 호텔에서 쫓겨나는 장면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이건 또 무슨 단막극이란 말인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병희(박순애)와 이에 절망해버린 민수(최민수)는 병희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바닷가를 찾아가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정리하기로 한다. 얼마 없는 전 재산을 다 써가며 가족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병희의 갈등도 깊어진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 딸 효영이(신진희)를 죽게 할 순 없다는 마음속 외침이 점점 커지고. 병희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도 없는 민수는 결국 마음을 돌린 병희에게 몹시 화를 낸다. 그런데 하필 이때 찾아온 불청객....... 드라마지만 이거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




이 화를 보는데 2022년 여름에 있었던 어떤 사건이 겹쳐졌다. 부부와 어린 딸이라는 가족 구성도 같고 자동차로 바다를 향해 이동하는 것도 같아서, 이미 이곳을 떠나버린 세 사람이 자꾸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젊은 부부가 무슨 사정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경제적인 문제로 짐작할 뿐),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반응과 부모에게 죽임 당한 아이가 불쌍하다는 반응이 팽팽히 맞섰다. 다른 거 둘째 치고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을 아이는 대체 무슨 죄일까? 이런 경우엔 누가 뭐래도 무조건 아이의 편이 되어주련다.

신이 야속한 건 사람을 무슨 기준으로 데려가는지 알 수가 없어서다. 최소한 어린이나 어린 자녀를 키우는 사람은 좀 천천히 데려가시지. 어린 자녀 두고 뇌출혈로 갑자기 가버린 지인이 불현듯 떠오른다.


아빠와 딸이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따뜻한 겨울. 영상 캡처


* 극 중 인물에게 '그 얼굴로 배우를 하지~' 엉뚱한 소리를 할 때가 있다. 역할에 비해 배우의 외모가 넘친다 싶으면 그렇다. 이 화의 최민수를 보며 뻘소리를...

* 박순애 하면 인현왕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MBC 조선왕조 500년 '인현왕후'에서 자애로운 인현왕후로 나왔는데 장희빈 역의 전인화와 연기 대결이 볼만했다. 은퇴하신 뒤로 우리나라 주식 부자 명단에서 가끔 뵈었다.




지난 겨울 우리는 - MBC 베스트극장 (도지원 감우성)


아주 우연히 만난 두 사람.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다. 서로를 운명이라 여기며 결혼을 약속하지만 이내 먹구름이 낀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의 부모는 철천지 원수나 다름없는 사이였던 것.

감우성이 도지원을 등 뒤에서 껴안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지난 겨울 우리는' 감우성 도지원.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79회 '지난 겨울 우리는'


: 1993. 2. 19 방영. 이덕자 원작. 김사현 연출. 박순영 극본. 도지원, 감우성, 박성미, 권성덕, 정영숙, 한상미, 강이은, 차광수, 김정현 출연.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아주 어린 시절에 남자가 저지른 죄.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번 지은 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서로의 기억 속에도 없는 일이기에 무시해보려 했지만,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두 사람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필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한 운명의 가혹함이란.

이 화가 유독 기억에 남았던 건 바로 백허그(back hug) 장면 때문이다. 물건을 돌려주러 온 여자가 자리를 뜨려 하자 뒤에서 붙잡듯 확 껴안는 남자.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이별한 상태에서 서로 감정을 누르고 있다가 터지는 장면이라 느낌이 아주 강렬했다. 덕분에 백허그에 대한 환상까지 생겼었는데.... 근 30년 만에 다시 봐도 멋지다.


도지원과 감우성
MBC 베스트극장 '지난 겨울 우리는' 도지원 감우성. 웨이브 캡처

캡처를 하다 보니 연출자가 장면 장면 신경을 많이 쓴 느낌이다. 별 장면이 아니었는데도 멈춰놓고 보면 스틸 사진처럼 근사하다. 다른 백허그 장면도 있는데 그림이 예쁘다(역시 백허그에 대한 환상을 심어줄만 했다). 원래는 죽음으로 완성되는 사랑을 그리려 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 두 사람이 바다에서 벌인 일은 실제인지 상상인지 알 수가 없다.

이 화는 백허그 얘기만 할까 했으나, 다시보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안 보고 넘어가기가 힘들다. 실로 오랜만에 다시 보고 나니 눈에 거슬리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잊고 있었던 추억을 되찾은 기분이 크다. 아울러 백허그에 대한 환상은 계속된다. 쭈욱~




* 여주인공의 오빠로 김정현이 나오는데 드라마 타이틀에는 이름이 없다. 단역이라 하기엔 대사도 몇 마디 있건만. MTM에서 보조 출연자로 나온 건가? MBC '아들과 딸'에서도 김정현 비슷하게 생긴 단역을 보았으나 사실 확인은 못 해보았다.

김정현이 어린아이와 놀아주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지난 겨울 우리는' 김정현. 웨이브 캡처

* 도지원은 SBS '토지'에서 홍씨 부인으로 나왔다. 연기를 못한 건 아니지만 이미지가 너무너무 안 어울렸다. 남편 조준구와 더불어 뼛속까지 악랄한 인물인데 아무리 봐도 그렇게 안 보이니.

* 최진실 최수종 주연의 MBC '질투'가 대박 나고 그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매혹'인데, 당시 신인급인 감우성이 최진실의 상대 역을 맡아 화제가 됐었다. 2회였나 감우성이 최진실에게 수위 높은 대사를 던지고 끝이 나서 충격 받았었는데 그게 뭐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자고 갈래?' 였었나?




2023-10-28

토끼의 아리아 - MBC 베스트극장 (김승욱 박그리나)


술김에 학생에게 키스한 대학 강사. 술이 깨니 정신이 번쩍 든다.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는 학생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데.......


여자가 남자를 뒤로 잡아 끌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토끼의 아리아. 출처 공식홈

MBC 베스트극장 제635화 토끼의 아리아


: 2006.04.22 방영. 곽재식 원작. 진헌수 극본. 손형석 연출. 김승욱, 박그리나, 김하균, 김미연, 이정현, 유형관, 장미화 등 출연.



이 화의 원작은 곽재식의 단편소설 [판소리 수궁가 중에서, 토끼의 아리아 "맥주의 마음"]. 곽재식은 카이스트 박사이자 기발한 소설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MBC 심야괴담회를 비롯해서 방송 패널로도 많이 나왔다. 더욱이 본업도 따로 있으면서 줄기차게 작품을 발표하는 그 필력이 놀랍고 부러울 뿐이다.

원작 소설은 읽지 않았고 이 화만 보고 리뷰를 쓰는 건데, MBC 공식홈에 밝혀놓은 기획 의도를 읽어보니 솔직히 황당하다. 극에서는 성추행범으로 학교에 소문나서 밥줄 끊길까봐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지어내 상황을 모면하는 못난이 밖에는 없던데. 간을 노리는 자라한테 속아 용궁에 갔다가 꾀를 발휘해 살아 돌아온 토끼 마냥, 주변 사물들로 그럴듯한 얘기를 지어내 경찰을 속이는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주인공 마냥 그리려 한 것은 알겠으나 이야기를 지어내는 의도가 워낙 지질하다 보니 그 기발함이 묻혀 버린다.

게다가 순순히 속아 넘어가는 여학생이 너무 바보 같이 그려져 더 반감이 드는 것도 있다. 미래의 교수 부인 운운하며 밀어붙이라는 동네 언니 말대로 짐까지 싸들고 동거할 각오로 오다니 이뭐병. 방영 당시에 봤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2020년대에 본 이 화는........ 한숨만 나온다.




 * 곽재식이 어떤 작품을 쓰는지 알고 싶다면 그의 단편소설 중 '초공간 도약 항법의 개발'부터 읽어보시기 바란다("지상 최대의 내기"라는 단편집에 실려있음). 갑질을 이렇게 실감 나게, 독특하게, 기발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또 있을까? 이 작품 읽고 그가 정말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신 - MBC 베스트극장 (이민정 이동규)

 
사건을 수사하면서 미스터리한 용의자에게 점점 빠져드는 형사. 심은하, 한석규 주연의 영화 '텔 미 썸딩'이 퍼뜩 떠오른다. 시선을 잡아 끄는 외모에 자꾸만 궁금증을 갖게 만드는 비밀의 여인. 이 화에서 이민정이 그런 역할이었다. 형사마저 본분을 잊고 빠져들게 만드는 팜므파탈 타투이스트. 결국 형사(이동규)에게도 문신이 새겨지고. 


배우 이민정과 이동규


MBC 베스트극장 제620회 '문신'

: 2005.11.26 방영. 이명숙 극본. 김상래 연출. 이동규, 이민정, 연운경, 박충선, 이대연, 장태성 등 출연.

이 화는 다시 보지 않고 기억에만 의존해서 리뷰를 써본다. '문신'은 재밌게 본 화였다. 뭐 그러니 머릿속에 남았겠지만. 여기에서 이민정이란 배우를 처음 보았다. 저 낯선 배우가 누구일까 막 궁금했었다. 이동규는 맡은 배역을 위해 실제로 호스트바에서 일을 해보았다는 인터뷰가 인상 깊었던 배우였다. 보고 나선 이민정 찍(그녀는 훗날 KBS '꽃보다 남자'에서 이민호의 정혼자 역으로 큰 인기를 얻는다).

리뷰를 써놓고 보니 내용이 없다. 
이럴 바엔 다시 보고 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