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9

쇼팽의 손 - MBC 베스트극장 (김서라 나한일)


드라마 시작부터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숨가쁘게 흐른다. 밤길을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는 드뷔시의 달빛과 함께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하지만 곧 쇼팽의 프렐류드 24번(Chopin prelude op.28 no.24)으로 바뀌면서 누군가의 손이 여자의 목으로 향한다. 그리고.

김서라, 나한일
MBC 베스트극장 쇼팽의 손. 김서라, 나한일.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39화 쇼팽의 손


: 1992. 4. 12 방영. 이종학 원작. 김남 극본. 강병문 연출. 나한일, 김서라, 임문수, 박상규, 김경숙, 박주미, 박현심, 이도련, 최선균, 이효신, 김민석, 신동욱, 한석규, 김현숙, 윤진숙 출연.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경치 좋은 강가에서 유명 피아니스트가 사망한 채 발견된다. 장례식에 참석한 음악잡지 기자 수진(김서라)은 그곳에서 떠오르는 평론가 경태(나한일)와 처음 인사를 나눈다. 부와 명예, 외모까지 가진 그가 솔로라는 사실에 수진은 그에게 급 관심이 간다. 두 번째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수진은 취재를 갔다가 두 피해자 사이의 공통점을 알아챈다. 특정한 피아노 콩쿠르의 입상자라는 것. 놀랍게도 수진 역시 출전해 상을 탔던 대회였다. 그 와중에 세 번째 사건이 일어나고 그 피해자 역시 콩쿠르 입상자인 게 밝혀지는데......

내용과는 별개로 쇼팽의 음악이 많이 나와서 보는 동안 귀가 즐거웠다. 드뷔시의 달빛이 생뚱맞게 느껴지긴 하지만 경태에게 의미가 큰 곡이니 패스. 손을 잃고 피아노를 잃고 인생을 잃은 자의 복수극. 군데군데 허술함을 빼면 소재와 스토리는 참 매력적이다. 다만 극 마지막에 나오는 명언은 안 넣었으면 좋았을 것을. 누구는 누군가의 장난으로 모든 것을 잃었는데, 이 명언은 왜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해내지 못했냐고 탓하는 것 같아서다. 쇼팽이 손을 다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는 훌륭한 작곡가가 되었다지만, 모두가 그렇게 쇼팽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찰스 램의 명언
MBC 베스트극장 쇼팽의 손

* 한석규가 피해자의 가족으로 잠시 나오는데 목소리와 발음이 너무 좋아서 단박에 튄다.

* 최선아 배우와 많이 닮아보이는 배우가 나온다. 성함이 김현숙 맞을까? 1991년 MBC 20기 공채 탤런트라고 하시니 맞을 수도.




- 쇼팽하면 쇼팽 콩쿠르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우승한 조성진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2016년 Beirut Chants Festival에서 연주한 Chopin prelude op.28 no.24 영상은 강력 추천! (03:15부터)



조성진이 연주하는 드뷔시의 달빛





따뜻한 겨울 - MBC 베스트극장 (박순애 최민수 신진희)


가진 것은 없지만 오손도손 살고 있던 부부에게 비극이 들이닥친다. 희망이 없는 부부는 어린 딸을 데리고 죽음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박순애와 최민수
MBC 베스트극장 따뜻한 겨울. 박순애, 최민수. 영상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19화 '따뜻한 겨울'


: 1991.11.17 방영. 신선희 극본. 이은규 연출. 박순애, 최민수, 신진희(아역), 이도련, 김정, 홍성선, 서영애, 이상철, 정인석, 유준석 출연.



베스트셀러극장으로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 있었다. 한 가족이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을 빌려 신기한 듯 구경한다. 엄마는 애들을 재우고 아빠는 연탄인지 뭔지로 연기를 피워놓고 가족 옆에 눕는다. 그러다 누가 들어왔던가 아니면 부부의 생각이 바뀌었던가 해서 다급히 환기를 시키는데.......

베스트극장 리스트에서 '따뜻한 겨울'을 발견하고 옳다구나! 하고 좋아했더니 아니었다. 비싼 호텔방을 빌려 하룻밤 자는 것만 똑같았다. 설마 기억이 왜곡되었나? 아닌데. 가족이 호텔에서 쫓겨나는 장면도 있었던 것 같은데. 아~ 이건 또 무슨 단막극이란 말인가~

시한부 선고를 받은 병희(박순애)와 이에 절망해버린 민수(최민수)는 병희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바닷가를 찾아가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정리하기로 한다. 얼마 없는 전 재산을 다 써가며 가족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병희의 갈등도 깊어진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 딸 효영이(신진희)를 죽게 할 순 없다는 마음속 외침이 점점 커지고. 병희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도 없는 민수는 결국 마음을 돌린 병희에게 몹시 화를 낸다. 그런데 하필 이때 찾아온 불청객....... 드라마지만 이거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




이 화를 보는데 2022년 여름에 있었던 어떤 사건이 겹쳐졌다. 부부와 어린 딸이라는 가족 구성도 같고 자동차로 바다를 향해 이동하는 것도 같아서, 이미 이곳을 떠나버린 세 사람이 자꾸만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젊은 부부가 무슨 사정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경제적인 문제로 짐작할 뿐),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반응과 부모에게 죽임 당한 아이가 불쌍하다는 반응이 팽팽히 맞섰다. 다른 거 둘째 치고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었을 아이는 대체 무슨 죄일까? 이런 경우엔 누가 뭐래도 무조건 아이의 편이 되어주련다.

신이 야속한 건 사람을 무슨 기준으로 데려가는지 알 수가 없어서다. 최소한 어린이나 어린 자녀를 키우는 사람은 좀 천천히 데려가시지. 어린 자녀 두고 뇌출혈로 갑자기 가버린 지인이 불현듯 떠오른다.


아빠와 딸이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따뜻한 겨울. 영상 캡처


* 극 중 인물에게 '그 얼굴로 배우를 하지~' 엉뚱한 소리를 할 때가 있다. 역할에 비해 배우의 외모가 넘친다 싶으면 그렇다. 이 화의 최민수를 보며 뻘소리를...

* 박순애 하면 인현왕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MBC 조선왕조 500년 '인현왕후'에서 자애로운 인현왕후로 나왔는데 장희빈 역의 전인화와 연기 대결이 볼만했다. 은퇴하신 뒤로 우리나라 주식 부자 명단에서 가끔 뵈었다.




지난 겨울 우리는 - MBC 베스트극장 (도지원 감우성)


아주 우연히 만난 두 사람.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가 않다. 서로를 운명이라 여기며 결혼을 약속하지만 이내 먹구름이 낀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의 부모는 철천지 원수나 다름없는 사이였던 것.

감우성이 도지원을 등 뒤에서 껴안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지난 겨울 우리는' 감우성 도지원. 웨이브 캡처

MBC 베스트극장 제79회 '지난 겨울 우리는'


: 1993. 2. 19 방영. 이덕자 원작. 김사현 연출. 박순영 극본. 도지원, 감우성, 박성미, 권성덕, 정영숙, 한상미, 강이은, 차광수, 김정현 출연.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아주 어린 시절에 남자가 저지른 죄. 고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한번 지은 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서로의 기억 속에도 없는 일이기에 무시해보려 했지만,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두 사람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필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한 운명의 가혹함이란.

이 화가 유독 기억에 남았던 건 바로 백허그(back hug) 장면 때문이다. 물건을 돌려주러 온 여자가 자리를 뜨려 하자 뒤에서 붙잡듯 확 껴안는 남자. 두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이별한 상태에서 서로 감정을 누르고 있다가 터지는 장면이라 느낌이 아주 강렬했다. 덕분에 백허그에 대한 환상까지 생겼었는데.... 근 30년 만에 다시 봐도 멋지다.


도지원과 감우성
MBC 베스트극장 '지난 겨울 우리는' 도지원 감우성. 웨이브 캡처

캡처를 하다 보니 연출자가 장면 장면 신경을 많이 쓴 느낌이다. 별 장면이 아니었는데도 멈춰놓고 보면 스틸 사진처럼 근사하다. 다른 백허그 장면도 있는데 그림이 예쁘다(역시 백허그에 대한 환상을 심어줄만 했다). 원래는 죽음으로 완성되는 사랑을 그리려 했던 게 아닐까 싶은데.... 두 사람이 바다에서 벌인 일은 실제인지 상상인지 알 수가 없다.

이 화는 백허그 얘기만 할까 했으나, 다시보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안 보고 넘어가기가 힘들다. 실로 오랜만에 다시 보고 나니 눈에 거슬리는 점도 있지만 그보다는 잊고 있었던 추억을 되찾은 기분이 크다. 아울러 백허그에 대한 환상은 계속된다. 쭈욱~




* 여주인공의 오빠로 김정현이 나오는데 드라마 타이틀에는 이름이 없다. 단역이라 하기엔 대사도 몇 마디 있건만. MTM에서 보조 출연자로 나온 건가? MBC '아들과 딸'에서도 김정현 비슷하게 생긴 단역을 보았으나 사실 확인은 못 해보았다.

김정현이 어린아이와 놀아주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지난 겨울 우리는' 김정현. 웨이브 캡처

* 도지원은 SBS '토지'에서 홍씨 부인으로 나왔다. 연기를 못한 건 아니지만 이미지가 너무너무 안 어울렸다. 남편 조준구와 더불어 뼛속까지 악랄한 인물인데 아무리 봐도 그렇게 안 보이니.

* 최진실 최수종 주연의 MBC '질투'가 대박 나고 그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매혹'인데, 당시 신인급인 감우성이 최진실의 상대 역을 맡아 화제가 됐었다. 2회였나 감우성이 최진실에게 수위 높은 대사를 던지고 끝이 나서 충격 받았었는데 그게 뭐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자고 갈래?' 였었나?




2023-10-28

토끼의 아리아 - MBC 베스트극장 (김승욱 박그리나)


술김에 학생에게 키스한 대학 강사. 술이 깨니 정신이 번쩍 든다. 자기를 좋아한다고 오해하는 학생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데.......


여자가 남자를 뒤로 잡아 끌고 있다
MBC 베스트극장 토끼의 아리아. 출처 공식홈

MBC 베스트극장 제635화 토끼의 아리아


: 2006.04.22 방영. 곽재식 원작. 진헌수 극본. 손형석 연출. 김승욱, 박그리나, 김하균, 김미연, 이정현, 유형관, 장미화 등 출연.



이 화의 원작은 곽재식의 단편소설 [판소리 수궁가 중에서, 토끼의 아리아 "맥주의 마음"]. 곽재식은 카이스트 박사이자 기발한 소설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 작가이다. MBC 심야괴담회를 비롯해서 방송 패널로도 많이 나왔다. 더욱이 본업도 따로 있으면서 줄기차게 작품을 발표하는 그 필력이 놀랍고 부러울 뿐이다.

원작 소설은 읽지 않았고 이 화만 보고 리뷰를 쓰는 건데, MBC 공식홈에 밝혀놓은 기획 의도를 읽어보니 솔직히 황당하다. 극에서는 성추행범으로 학교에 소문나서 밥줄 끊길까봐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지어내 상황을 모면하는 못난이 밖에는 없던데. 간을 노리는 자라한테 속아 용궁에 갔다가 꾀를 발휘해 살아 돌아온 토끼 마냥, 주변 사물들로 그럴듯한 얘기를 지어내 경찰을 속이는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의 주인공 마냥 그리려 한 것은 알겠으나 이야기를 지어내는 의도가 워낙 지질하다 보니 그 기발함이 묻혀 버린다.

게다가 순순히 속아 넘어가는 여학생이 너무 바보 같이 그려져 더 반감이 드는 것도 있다. 미래의 교수 부인 운운하며 밀어붙이라는 동네 언니 말대로 짐까지 싸들고 동거할 각오로 오다니 이뭐병. 방영 당시에 봤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2020년대에 본 이 화는........ 한숨만 나온다.




 * 곽재식이 어떤 작품을 쓰는지 알고 싶다면 그의 단편소설 중 '초공간 도약 항법의 개발'부터 읽어보시기 바란다("지상 최대의 내기"라는 단편집에 실려있음). 갑질을 이렇게 실감 나게, 독특하게, 기발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또 있을까? 이 작품 읽고 그가 정말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신 - MBC 베스트극장 (이민정 이동규)

 
사건을 수사하면서 미스터리한 용의자에게 점점 빠져드는 형사. 심은하, 한석규 주연의 영화 '텔 미 썸딩'이 퍼뜩 떠오른다. 시선을 잡아 끄는 외모에 자꾸만 궁금증을 갖게 만드는 비밀의 여인. 이 화에서 이민정이 그런 역할이었다. 형사마저 본분을 잊고 빠져들게 만드는 팜므파탈 타투이스트. 결국 형사(이동규)에게도 문신이 새겨지고. 


배우 이민정과 이동규


MBC 베스트극장 제620회 '문신'

: 2005.11.26 방영. 이명숙 극본. 김상래 연출. 이동규, 이민정, 연운경, 박충선, 이대연, 장태성 등 출연.

이 화는 다시 보지 않고 기억에만 의존해서 리뷰를 써본다. '문신'은 재밌게 본 화였다. 뭐 그러니 머릿속에 남았겠지만. 여기에서 이민정이란 배우를 처음 보았다. 저 낯선 배우가 누구일까 막 궁금했었다. 이동규는 맡은 배역을 위해 실제로 호스트바에서 일을 해보았다는 인터뷰가 인상 깊었던 배우였다. 보고 나선 이민정 찍(그녀는 훗날 KBS '꽃보다 남자'에서 이민호의 정혼자 역으로 큰 인기를 얻는다).

리뷰를 써놓고 보니 내용이 없다. 
이럴 바엔 다시 보고 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