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0

감자 - KBS TV문학관 (조태숙 김해권 민지환)


초라한 행색에 어두운 표정의 두 남녀가 부지런히 걷는다. 해가 지기 전에 평양성 안에 들어가려 했으나 지쳐서 길에 주저 앉는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지나가던 넝마주이가 말을 건넨다. 두 사람, 복녀(조태숙)와 복녀의 남편(김해권)은 넝마주이(문오장)의 집 골방에서 지내게 된다.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고향을 떠나왔지만 새로운 동네 칠성동에서도 먹고 살 길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복녀가 몸을 판 뒤 돈을 받고 있다
 KBS TV문학관 감자. 복녀 역의 조태숙

UHD로 만나는 티브이 문학관 "감자"


: 제 154화. 1984.10.20 방영. 2023.07.10 재방영. 김동인 원작. 전세권 연출. 박찬성 극본. 조태숙, 김해권, 민지환, 문오장, 홍영자, 신수강, 박병호, 장학수, 방숙례, 이한나, 반효정, 조인표(아역) 등 출연.  

=== 줄거리 나옵니다 스포일러 주의 ===


남편은 복녀가 돈을 벌어오면 그것으로 지게를 사서 일을 하겠다고 한다. 자기는 비럭질을 할 수 없다며 복녀에게 하라고 강요한다. 복녀는 할 수 없이 구걸을 하러 다니지만 팔다리 멀쩡하고 젊디 젊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냥 선배인 동네 꼬마(조인표)의 조언대로 복녀는 장애인인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산다. 복녀가 그렇게 번 돈으로 남편이 지겟꾼 일을 시작하지만 길에서 자빠져 자느라 손님을 놓친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도 복녀의 남편은 지독한 게으름뱅이에 농사 일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나중엔 그에게 땅을 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남편이 복녀를 마음대로 부려 먹는 건 전재산 80원을 들여 그녀를 사왔기 때문이었다. 복녀는 원래 선비 집안의 딸이었는데, 가세가 기울면서 집을 정리해도 빚을 다 갚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복녀는 어머니(반효정) 뜻에 따라 열다섯 어린 나이에 자기보다 무려 스무 살이나 많은 홀애비와 혼인해야 했다. 

딸 같은 복녀를 안타깝게 여기던 넝마주이의 부인(홍영자)은 송충이 잡는 일을 소개해준다. 이 일에는 동네 여자들이 대거 동원되었는데, 일하는 중에 감독관(장학수)과 함께 사라지는 여자는 돈을 더 받았다. 처음엔 복녀도 그런 여자들을 욕했으나, 감독관에게 몸을 팔고 일당보다 더 큰 돈을 벌게 되자 그 짓을 계속 하게 된다. 


어느 날, 복녀의 남편이 장물을 사는 바람에 주재소에 잡혀간다. 모르고 그랬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복녀는 몸을 팔아서 구한 돈으로 남편을 빼낸다. 남편은 복녀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다 알면서도 말리기는커녕 그 돈으로 먹고 산다. 술에 취해 소리를 내지르고 '잘못했어요' 양손을 빌며 울부짖지만 자책하는 건 그때 뿐이다. 

복녀는 왕서방(민지환)의 밭에서 감자를 훔치다 걸리지만 몸으로 위기를 넘긴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지속적으로 몸과 돈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된다. 심지어 왕서방이 복녀의 집에 오기로 하면 남편은 순순히 자리를 비워준다. 복녀는 고향에 꼭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몸을 팔아) 돈을 모은다. 

그런 복녀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다름 아닌 왕서방이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돈벌이에 위기를 느낀 복녀는 왕서방 집에 찾아가 새색시와 자고 있는 그를 칼로 위협한다. 

실랑이 끝에 칼에 찔린 사람은 복녀였다. 왕서방은 의원에게 돈을 주고 사인을 조작한다. 복녀의 남편에게도 큰 돈을 쥐어주고 입을 막는다. 그날 밤 복녀의 집에 불이 난다. 화면이 바뀌고,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복녀의 남편이 관을 지게에 지고 마을을 떠난다. 처음 이 동네에 들어올 때 밟았던 길을 다시 밟으면서.



너무 가난하던 보릿고개 시절, 삶의 첫 번째 명제는 '생존'이었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는 것. 가난이 무서운 건 어떤 일이든 하게 만드는 명분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복녀는 어떻게든 돈을 벌려다 도덕의 선을 넘게 되었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품으며 도덕성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 희망은 복녀를 파괴 시키고, 그럴 수록 복녀는 희망에 매달려 더욱 열심히 몸을 판다. 복녀의 마지막 보루가 복녀를 망가뜨리는 원인이 되는 아이러니(irony). 복녀에게 돈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렸다.

부모와 남편 잘못 만나 타락하고 개죽음까지 당한 복녀. '감자'도 보고 나니(소설까지 다시 읽고 나니) 고구마 천 개는 물 없이 삼킨 듯하다. 왕서방을 기다리며 화장하는 복녀를 위해 남편이 거울을 잡아주는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인간성을 상실한 두 인간의 모습을 이보다 더 잘 압축해서 보여줄 수 있을까? 뛰어난 화면 연출에 감탄했다. 추천!

화장하는 복녀를 위해 남편이 거울을 들어주고 있다
 KBS TV문학관 '감자'

* 화재 장면은 원작 소설에는 없는데, 남편이 집과 함께 복녀의 시신을 태운 게 아닐까? 칼에 찔려 죽은 것을 뇌일혈로 조작했으니 시신이 썩기 전에는 들통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은? 아무래도 남편이 복녀의 관을 매고 고향으로 향하는 것처럼 연출한 느낌인데 재가 된 복녀가 들어있지 않을까 소설을 써본다(또 관이 가벼워 보이기도 하고🙄).

* 이 작품에서 말하는 '감자'는 고구마라고 한다. 옛 한국어에서 감자(Potato)를 저(藷) 또는 북저(北藷)라 불렀고 고구마(sweet potato)를 달콤한 저, 즉 감저(甘藷)라고 불렀다(나무위키 참고).  



2023-07-08

분례기 - KBS TV문학관 & SBS 창사 특집 드라마


'분례기'하면 사실 SBS 드라마가 먼저 떠오른다. 방영 당시 재미있게 봐서 그렇기도 하지만 티비문학관보다는 한참 뒤에 본 탓이다. sbs는 개국 초기(대문자 아닌 소문자 시절) 토속적인 작품을 곧잘 만들었었다. '분례기'도 그중 하나였다. 듣기만 해도 무슨 냄새가 날 것 같은 이름의 주인공 '똥례'를 '신영진'이라는 신인 배우가 어찌나 잘 그려내던지 그래서 더 인상에 남은 것도 있다.


냉수 한 그릇 떠놓고 분례가 혼인식을 하고 있다
KBS TV문학관 분례기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여섯 번째 작품 '분례기'


: 1983.05.14 KBS 방영. 2023.4.10 재방영. 방영웅 원작. 최경식 극본. 김재현 연출. 이덕희, 김인문, 장항선, 장학수, 박혜숙, 최주봉, 김난영, 정종준, 최선아, 이원종, 곽정희, 황민, 박현정, 조은덕, 방숙례, 박선희, 안성태, 박해상, 공경구, 이동진 출연.


쪽두리에 한복을 차려 입은 분례
SBS 창사 특집 드라마 분례기

SBS 창사 특집 드라마 "분례기"

: 1992.01.20 ~ 03.10 SBS 방영. 16부작. 방영웅 원작. 장구태 극본. 이종한 연출. 신영진, 윤여정, 윤문식, 이동진, 김인문, 나문희, 양금석, 장항선, 최낙천, 여운계 등 출연.


 다시 본 TV문학관 '분례기'는 요즘 말로 핵핵핵 핵고구마였다! sbs 드라마 내용도 다르지 않았을 텐데 과연 내가 이걸 재밌게 보았단 말인가? ??? 옛날엔 귀하게 키우면 귀신이 일찍 데려간다고 해서 이름을 천하게 지었다는 속설도 있지만 그거야 좀 사는 집 얘기일 것이고, 분례[똥례]의 경우엔 화장실[뒷간,똥둑간]에서 낳았다고 그냥 붙인 이름이다. 열여덟살 분례(이덕희)의 일과를 보면 살림도 하고 나무도 베어 오고 일당백 집안 일꾼이다. 고자로 소문난 동네 유부남 용팔(장학수)을 따라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는데, 어느 날 이 놈이 분례한테 성욕을 느끼고는 강간을 해버린다. 고자라고 안심했다가 무방비로 당한 것이다.

 노름방에서 심부름을 해주며 개평으로 먹고 사는 분례의 아빠 석씨(김인문)는 노름꾼 영철(장항선)의 모친(김난영)으로부터 분례를 며느리로 달라는 얘기를 듣는다. 비록 3대 독자는 노름에 미쳐 있고 며느리가 여러 번 바뀌긴 했지만 국밥집을 운영하며 꽤나 먹고 사는 집안이다. 더구나 땅까지 떼어준다고 하니 지지리궁상 석씨에겐 아주 솔깃한 제안이다. 하지만 처음엔 단칼에 거절했다가 노름꾼 승원(최주봉)에게 무시를 한번 당하고는 분례를 그 집에 보내기로[팔아먹기로] 결심한다. 분례의 엄마(박혜숙)는 진즉부터 딸을 이용해 빈곤을 해결하고 싶어 했다. '니 한 몸 죽어서 친정 식구들 살린다고 생각해라', '잘 살고 못 살고는 다 너한테 달렸다' 따위의 조~옥같은 말들을 해주며 눈물을 짜는 엄마라니. 그 모습이 가증스럽다. 
 

 
자랑할 만한 혼사가 아니기에 석씨는 마을 사람들 몰래 딸을 데리고 영철의 집으로 간다. 그 며칠 전 마을에서는 큰일이 있었다. 분례의 친구 봉순(최선아)이 혼인을 앞두고 목을 맨 것이다. 동네 상여막(=상여 창고)을 자주 들여다보았던 분례는 봉순이 승원과 같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둘이 꽤 깊은 사이처럼 보였으나 이내 승원은 자기 말을 안 들으면 동네에 소문을 내겠다며 봉순을 협박하고 있었다. 분례는 자신이 강간당한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듯 친구의 일도 말하지 못했다. 봉순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은 실상도 모르면서 봉순을 욕한다. 특히 용팔의 처와 분례의 엄마가 목소리를 높인다. 
 
국수 한 그릇과 물 한 대접 놓고 초라하게 혼례를 올린 분례는 그나마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인간 답게 산다. 밤새 노름방에 가 있는 남편을 대신해 장에서 사온 다람쥐를 친구 삼아 외로움을 달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영철이 폭탄선언을 한다. 한몫 크게 챙기면 다 그만둘 거라고.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큰돈을 따서 분례에게 맡긴다. 자기가 돈을 달라고 해도 절대 내주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곧 다시 노름에 미쳐서는 승원에게 돈 심부름을 시킨다. 
 

 
다람쥐와 놀고 있었던 분례는 돈 구경도 못 했다며 승원을 쫓아 버리고, 승원은 방 밖에서 분례의 말소리만 듣고는 분례가 서방질을 했다고 영철에게 전한다. 그 말에 돌아버린 영철은 집으로 달려와 분례를 무자비하게 패고는 그 돈을 가져다 모두 잃는다. 시어머니 역시 남의 말만 듣고 분례에게 나가라고 소리친다. 해명 한 번 못하고 쫓겨난 분례는 친정으로 되돌아오는데 눈빛부터 정상이 아니다. 놀란 분례의 부모는 딸을 위해 굿판을 열지만 그 소란을 틈 타 분례는 사라져 버린다. 어딘가로 가고 있는 분례를 본 용팔이 그 서러운 이름을 목놓아 부를 뿐. 
 
아아 혈압이 솟구친다!
원작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는데 줄거리를 보니 드라마보다 더 하다. 분례가 노름꾼 남편에게 얻어 맞고 쫓겨났을 때 동네 놈팡이들한테 집단으로 강간을 당한다고.... 조카 십팔색 크레파스 샹샹바!

승원이 봉순을 협박했다고 폭로해서 그놈을 진즉에 개박살 냈더라면 어땠을까? 승원이 석씨에게 (떵 닦을) 종이를 가져다 달라고 했을 때 석씨가 종이 대신 따귀를 날린 것에 대한 복수를 그 딸에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 정말 개스키... 물론 남의 말 한마디에 부인 패고 쫓아낸 놈도 개스키. 강간하는 놈들도 개스키. 딸을 팔아먹은 부모들도 개스키. 분례의 인생이 여성 수난사 그 자체이다. 
 


작아질 대로 작아진 분례의 모습 위로 깔리는 김동애의 창이 어찌나 구슬프게 들리는지, 그간 험난한 시대를 살아왔고 앞으로 또 살아갈 수많은 분례들이 새삼 그 위로 겹쳐진다. 
 

* 영철 모친(김난영)과 노름방 주모(곽정희), 무당(박현정)으로 나온 세 배우가 굉장히 닮아 보인다.

* 분례의 동생으로 요절한 가수 박길라(박선희)가 나온다.

* 원작 소설을 쓴 방영웅 작가는 2022년에 돌아가셨다. 

* 윤정희, 이순재, 허장강 주연의 영화도 있다. 1971년 개봉. 유현목 감독.

* SBS 분례기의 주인공 신영진 배우는 1994년 활동을 그만두고 캐나다에서 오래 살았다고 한다. 출판사, 안경원 등에서 일했다고. 10년 만에 다시 복귀해서 지금은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2023-07-07

봄봄 - KBS TV문학관 (박준금 김진태 이신재)


말은 점순이네 '데릴사위'지만 누가 봐도 그 집 머슴으로 살고 있는 주인공 나(김진태). 점순이(박준금)와 혼인할 날만을 기다리며 몇 년을 견뎠지만 점순이네 아버지(이신재)는 딸이 충분히 자라지 않았다며 혼인을 계속 미룬다. 설상가상으로 점순이의 키는 왜 자라지 않고 맨날 제자리인지 미칠 노릇이다. 이러다 총각귀신으로 늙어 죽을 판. 더 이상 못 참아!


기분이 토라진 점순이. 일을 안 하고 있는 주인공.
KBS TV문학관 봄봄. 왼쪽부터 박준금, 김진태, 이신재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다섯 번째 작품 '봄봄'


: 1983.05.07 방영. 2023.04.03 재방영. 김유정 원작. 최경식 극본. 김충길 연출. 김진태, 박준금, 이신재, 전원주, 박칠용, 이한수, 서영진, 이종만, 김윤형, 김을동, 신수강, 이난희, 박규식, 김순덕, 송보영, 이종남 출연.




이 화는 어렸을 때 본 기억이 확실히 난다. 재미있기도 재미있었는데 점순이에게 격하게 이입을 해서다. 당시 키가 아주 작았던 나는 학교에 가면 유치원에나 가라는 놀림을 밥 먹듯 당하고 있었다. 난쟁이, 땅꼬마, 땅콩, 앉은뱅이.... 
키 작은 이에게 흔하게 붙여지는 별명은 다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키 때문에 고통 받는 점순이가 남 같지 않았다. 키가 작고 싶어서 작은 사람이 어딨냐고~ 자라지 않는데 어떡하냐고~ (다시 생각해보니까 열 받네?)

남자 주인공도 혼인을 핑계로 이용만 당하고 있으니 딱하긴 마찬가지였다. 참다 참다 폭발한 주인공이 점순이를 기둥 앞에 세우고(?) 낫인지 칼인지 도끼인지 뭔가로 기둥에 자국을 내는 장면이 기억나는데, 그 기구가 무엇이었는지는 이따 확인해 볼 생각이다. (추가 : 드라마를 보니 점순이의 아버지가 점순이 키 보다 한뼘 더 위쪽에 도끼로 자국을 내는 장면만 나온다. 내가 본 건 뭐였을까??)




결국은 목적을 이룬 것 같은데, 소설도 읽은 지 너무 오래 되었고 이 화도 본 지 40년이 흘러서 솔직히 결말이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 귀엽고 깜찍했던 것만 생각나는 점순이가 시크릿가든의 문분홍 여사 박준금 배우였다니! 김진태 배우는 마치 소설 속에서 걸어 나온 듯 싱크로율 100%에 가까운 캐스팅이어서 기억이 확실히 난다. 그 뒤로 노다지, 먼동 같은 대하 사극에서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셔서 잊을 수 없는 배우가 되었다. 


- 'UHD로 만나는 TV문학관'의 시청률을 보니 0.1~0.3% 수준이다. 생각보다 낮아서 안타깝다. MSG 맛은 전혀 느낄 수 없는 진한 청국장 같은 맛인데.... 물론 방영 시간이 늦긴 하다. 월요일 오전이면 많은 분들이 출근을 위해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이고 다 보고 나면 오전 2시가 훌쩍 넘는다. 그래도 추천해 본다. 특히 월요병으로 잠이 안 오신다면 0시 25분 KBS 2TV 채널을 틀어보세요.



갯마을 - KBS TV문학관 (조옥희 백수련 김성환 주현)


갯마을. 흔하게 쓰는 말이지만 정확한 뜻을 몰라서 찾아보니 갯가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갯가'의 뜻을 찾아보니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의 물가, 물이 흐르는 가장자리.


해순이 허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다
KBS TV문학관 갯마을. 배우 조옥희. 예고편 캡처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네 번째 작품 '갯마을'


: 1982.07.31 방영. 2023.03.27 고화질 방영. 오영수 원작. 이은교 극본. 주일청 연출. 조옥희, 백수련, 주현, 김성환, 서승현, 이주실, 김영순, 김동완, 신수강, 김순구, 방숙례, 박승규, 김하림, 오기환, 장칠군, 김상락, 이두섭 출연.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주인공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색시 해순(조옥희)이다. 남편 성구(주현)가 마을 남자들과 함께 고등어배를 타고 나간다. 온 마을 사람들이 오매불망 배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가운데, 엄청난 폭풍우가 몰려와 마을이 쑥대밭이 된다. 두 달 있다 돌아오겠다던 배는 두 해가 넘도록 소식이 없다. 집단으로 남편을 잃은 여자들은 서로 의지해가며 모진 삶을 이어간다.
 

 
혼자된 해순에게 상수(김성환)가 자꾸 들이댄다. 해순의 시어머니(백수련)는 상수가 며느리에게 마음이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심란해진다. 사실 해순의 시어머니도 바다에 남편을 잃은 과부였다. 과부 심정은 과부가 안다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며느리가 안쓰럽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해순의 방에 누군가 몰래 들어왔다가 도망가는 일이 벌어진다. 시어머니는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지만 모른 척한다. 그 뒤로 상수는 해순에게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마을에 소문을 낸다. 남편이 살아 돌아올 희망이 없는데도 미련을 못 버리고 있던 해순은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 상수를 받아들이고, 시어머니는 순순히 해순을 보내준다.
 
바닷가를 떠나 상수의 고향에 가게 된 해순은 또다시 독수공방이 된다. 상수가 전쟁에 불려 간 것이다(상수의 전사 통지서를 받는 장면은 해순의 상상 같음).  해순은 바다를 그리워하다 갯마을로 다시 도망쳐 온다. 반가운 동네 언니들과 시어머니를 보고 표정이 살아나는 해순. 갯마을에서의 삶은 계속된다.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인습에 휘둘리는 여자의 삶이 답답하고 안타깝지만, 유니콘 같은 해순의 시어머니가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된다. 본인도 아들을 잃었지만 며느리를 더 생각해주는 어른으로서의 모습이 감동적이다. 그리고 친자매처럼 서로를 챙겨주는 과부들의 의리와 우정도 보기 좋다. 하루아침에 남편을 잃었지만 꿋꿋이 살아가는 여자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평화로운 바닷가 풍경은 보너스. 촬영이 끝내준다. 적절하게 깔리는 음악은 극을 한층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준다. 잠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하다.


* 엄밀히 말해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감정을 강요하고 받아들이길 바라는 건 폭력인데, 여기에서도 그런 모습이 애정처럼 그려진다. 안 돼요돼요돼요돼요 돼요 식의 묘사. 예전엔 불편함도 못 느꼈다. 


장마 - KBS TV문학관 (정애란 여운계)


교양인이라면 읽어야 할 우리나라 문학작품에 꼭 들어있는 소설 '장마'. 안 읽었다. 영화도 있는데 안 봤다. 티브이문학관도 안 본 줄 알았는데 눈 먼 역술인이 점치는 장면이 낯익었다. 설마 여기만 봤나? 😅


빗속에서 두 어머니가 싸우고 있다
KBS TV문학관 장마. 왼쪽부터 여운계, 정애란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세 번째 방영작 "장마"


: 1982.06.19 방영. 2023.03.20 UHD 방영. 원작 윤흥길. 극본 홍승연. 연출 심현우. 정애란, 여운계, 권성덕, 서우림, 송종원, 민욱, 김형자, 박선희, 조인표, 기정수, 최주봉, 오기환, 이정훈, 전무송, 이현두, 김동완, 유재필, 유화춘, 강정아, 이현승, 김선자, 최성희, 신철, 김유신, 김시욱, 김정훈, 안주영, 김태량 출연.


===== 스포일러 주의! & 배역 이름을 몰라서 배우 이름으로 호칭 =====


6.25 전쟁이 한창인 어느 시골 마을. 비가 질리도록 퍼붓는 장마철이 배경이다. 공산당을 돕다가 도망간 여운계의 둘째 아들이 집에 몰래 나타난다. 가족들이 자수를 권하는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작은 인기척에 기겁을 하고 도망가버린다. 사실 그 소리는 여운계의 집에 같이 사는 사돈댁 정애란이 화장실을 다녀오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안방에 접근한 것이었다.


여운계의 친손자이자 정애란의 외손자인 동만이는 웬 낯선 남자에게서 삼촌에 대한 질문을 받는데 - 아버지가 삼촌 얘기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줬음에도 - 초콜릿에 넘어가 삼촌이 집에 왔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길로 동만이의 아버지가 끌려가고 동만이는 친할머니의 미움을 사 외할머니의 방에서 지낸다.

꿈이 잘 맞는 정애란은 이빨이 강제로 뽑히는 꿈을 연달아 꾸고는 전쟁에 나간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을 예감하는데, 아들이 전사했다는 통보가 온다. 떨리는 손으로 완두콩을 까면서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암시롱도 않다'를 반복해서 읊조리는데 대성통곡하는 것보다 더욱 슬프게 느껴진다.

사실 여운계의 아들(송종원)이 공산당 앞잡이 노릇을 하지 않았다면 정애란의 아들(민욱)은 더 오래 숨어 지낼 수도 있었다. 송종원이 민욱의 은신처로 공산당들을 데려가자 그들은 미친 듯이 총을 쏴댔다. 다행히 민욱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지만 그 바람에 정신이 든 여운계의 아들도 자기가 지은 죄로부터 도망을 갔던 것.


아무튼 아들을 잃고 마음이 상한 정애란은 모질게 퍼붓는 장맛비를 향해 화풀이를 한다. 이것을 들은 여운계는 내 아들 죽으라고 하는 소리냐며 크게 화를 내고 두 사람의 대립은 극으로 치닫는다.

오매불망 둘째 아들을 기다리던 여운계는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 아들이 돌아올 날짜를 점지받고 새 옷과 음식을 준비한다. 그리고 전날부터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아들은 안 오고 웬 처음 보는 뱀이 나타난다. 여운계는 뱀을 바라보다 정신을 잃고, 정애란은 제사상을 차려놓고 뱀을 달랜다. 집안 걱정은 하지 말고 어여 가던 길 가라고. 거짓말처럼 뱀은 나무에서 내려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운계는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얘기를 다 전해 듣고는 정애란에게 고마움을 표시한다. 같은 아픔을 가진 두 사람은 손을 굳게 맞잡는다.

어머니가 뱀을 집에서 내보내고 있다
KBS TV문학관 장마

장마로 대비되는 전쟁과 남북으로 대비되는 두 어머니와 그 아들들.
드라마 속에선 두 어머니가 화해했지만, 드라마가 만들어진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현실에선 남북이 대립 중이다. 통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자유롭게 오고 가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통일도 이루어지지 않을까?

앞서 방영한 두 작품(산골나그네, 열녀문)은 보면서 속이 너무 터졌는데 '장마'는 두 어머니의 연기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정애란 배우께서 뱀을 달래고 보내는 장면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수신료의 가치가 느껴지는 기획이다.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