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라한 행색에 어두운 표정의 두 남녀가 부지런히 걷는다. 해가 지기 전에 평양성 안에 들어가려 했으나 지쳐서 길에 주저 앉는다.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지나가던 넝마주이가 말을 건넨다. 두 사람, 복녀(조태숙)와 복녀의 남편(김해권)은 넝마주이(문오장)의 집 골방에서 지내게 된다. 먹고 살 길이 없어서 고향을 떠나왔지만 새로운 동네 칠성동에서도 먹고 살 길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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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TV문학관 감자. 복녀 역의 조태숙 |
UHD로 만나는 티브이 문학관 "감자"
: 제 154화. 1984.10.20 방영. 2023.07.10 재방영. 김동인 원작. 전세권 연출. 박찬성 극본. 조태숙, 김해권, 민지환, 문오장, 홍영자, 신수강, 박병호, 장학수, 방숙례, 이한나, 반효정, 조인표(아역) 등 출연.
=== 줄거리 나옵니다 스포일러 주의 ===
남편은 복녀가 돈을 벌어오면 그것으로 지게를 사서 일을 하겠다고 한다. 자기는 비럭질을 할 수 없다며 복녀에게 하라고 강요한다. 복녀는 할 수 없이 구걸을 하러 다니지만 팔다리 멀쩡하고 젊디 젊은 그녀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냥 선배인 동네 꼬마(조인표)의 조언대로 복녀는 장애인인 척하며 사람들의 동정을 산다. 복녀가 그렇게 번 돈으로 남편이 지겟꾼 일을 시작하지만 길에서 자빠져 자느라 손님을 놓친다. 고향을 떠나기 전에도 복녀의 남편은 지독한 게으름뱅이에 농사 일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나중엔 그에게 땅을 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남편이 복녀를 마음대로 부려 먹는 건 전재산 80원을 들여 그녀를 사왔기 때문이었다. 복녀는 원래 선비 집안의 딸이었는데, 가세가 기울면서 집을 정리해도 빚을 다 갚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복녀는 어머니(반효정) 뜻에 따라 열다섯 어린 나이에 자기보다 무려 스무 살이나 많은 홀애비와 혼인해야 했다.
딸 같은 복녀를 안타깝게 여기던 넝마주이의 부인(홍영자)은 송충이 잡는 일을 소개해준다. 이 일에는 동네 여자들이 대거 동원되었는데, 일하는 중에 감독관(장학수)과 함께 사라지는 여자는 돈을 더 받았다. 처음엔 복녀도 그런 여자들을 욕했으나, 감독관에게 몸을 팔고 일당보다 더 큰 돈을 벌게 되자 그 짓을 계속 하게 된다.
어느 날, 복녀의 남편이 장물을 사는 바람에 주재소에 잡혀간다. 모르고 그랬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복녀는 몸을 팔아서 구한 돈으로 남편을 빼낸다. 남편은 복녀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다 알면서도 말리기는커녕 그 돈으로 먹고 산다. 술에 취해 소리를 내지르고 '잘못했어요' 양손을 빌며 울부짖지만 자책하는 건 그때 뿐이다.
복녀는 왕서방(민지환)의 밭에서 감자를 훔치다 걸리지만 몸으로 위기를 넘긴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지속적으로 몸과 돈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된다. 심지어 왕서방이 복녀의 집에 오기로 하면 남편은 순순히 자리를 비워준다. 복녀는 고향에 꼭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몸을 팔아) 돈을 모은다.
그런 복녀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다름 아닌 왕서방이 결혼을 한다는 것이었다. 돈벌이에 위기를 느낀 복녀는 왕서방 집에 찾아가 새색시와 자고 있는 그를 칼로 위협한다.
실랑이 끝에 칼에 찔린 사람은 복녀였다. 왕서방은 의원에게 돈을 주고 사인을 조작한다. 복녀의 남편에게도 큰 돈을 쥐어주고 입을 막는다. 그날 밤 복녀의 집에 불이 난다. 화면이 바뀌고,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복녀의 남편이 관을 지게에 지고 마을을 떠난다. 처음 이 동네에 들어올 때 밟았던 길을 다시 밟으면서.
너무 가난하던 보릿고개 시절, 삶의 첫 번째 명제는 '생존'이었다.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는 것. 가난이 무서운 건 어떤 일이든 하게 만드는 명분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복녀는 어떻게든 돈을 벌려다 도덕의 선을 넘게 되었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겠다는 희망을 품으며 도덕성을 완전히 버리게 된다. 희망은 복녀를 파괴 시키고, 그럴 수록 복녀는 희망에 매달려 더욱 열심히 몸을 판다. 복녀의 마지막 보루가 복녀를 망가뜨리는 원인이 되는 아이러니(irony). 복녀에게 돈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어버렸다.
부모와 남편 잘못 만나 타락하고 개죽음까지 당한 복녀. '감자'도 보고 나니(소설까지 다시 읽고 나니) 고구마 천 개는 물 없이 삼킨 듯하다. 왕서방을 기다리며 화장하는 복녀를 위해 남편이 거울을 잡아주는 장면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인간성을 상실한 두 인간의 모습을 이보다 더 잘 압축해서 보여줄 수 있을까? 뛰어난 화면 연출에 감탄했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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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TV문학관 '감자' |
* 화재 장면은 원작 소설에는 없는데, 남편이 집과 함께 복녀의 시신을 태운 게 아닐까? 칼에 찔려 죽은 것을 뇌일혈로 조작했으니 시신이 썩기 전에는 들통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은? 아무래도 남편이 복녀의 관을 매고 고향으로 향하는 것처럼 연출한 느낌인데 재가 된 복녀가 들어있지 않을까 소설을 써본다(또 관이 가벼워 보이기도 하고🙄).
* 이 작품에서 말하는 '감자'는 고구마라고 한다. 옛 한국어에서 감자(Potato)를 저(藷) 또는 북저(北藷)라 불렀고 고구마(sweet potato)를 달콤한 저, 즉 감저(甘藷)라고 불렀다(나무위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