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9

불 [Fire] - KBS TV문학관 (조민수 김진태 백수련)


외진 산골에 사는 만보(김진태)는 소를 팔러 장에 가다가 아랫마을 아저씨(박용식)를 만나게 된다. 소값을 제대로 받아 기분이 좋은 만보에게 아저씨가 용건을 꺼낸다. 형 부부가 죽어서 조카 넷을 떠맡게 되었는데 그중 순이(조민수)를 신부로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순이가 벽에 기대어 서럽게 울고 있다
TV문학관 '불'에서 순이로 나온 조민수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불"


: 제213화. 1986.01.18 방영. 2023.07.24 재방영. 현진건 원작. 이홍구 극본. 김재순 연출. 조민수, 김진태, 백수련, 민지환, 전원주, 박용식, 홍영자, 김동완, 박건식, 김상락, 김종구, 김영기, 이계영, 차철순, 최건호 출연.


고리채를 빌려준 황주사(김동완)가 순이를 탐내고 있다며, 만보가 갖고 있는 200원이라면 빚을 겨우 갚을 수도 있겠다고 한다. 노총각이었던 만보는 고민하다 순이를 데려가기로 한다. 철 모르는 10대 소녀 순이는 졸지에 만보와 혼인을 하고 그의 집에 가게 된다. 



만보의 모친(백수련)은 소 판 돈으로 밭을 살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한데 아들이 그 돈으로 여자를 데려오자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대신 소 한 마리 몫을 해야 한다고 순이에게 바로 집안일을 시킨다. 밥이나 겨우 할 줄 알았던 순이는 동네 아주머니(홍영자)의 도움으로 시어머니가 시킨 일들을 해낸다. 

낮에는 시어머니가 가만 두지 않고 밤에는 짐승 같은 만보가 가만 두지 않는다. 순이의 삶은 곧 지옥이 된다. 헛간이나 부엌에서 잠들어도 깨어나 보면 만보가 눈앞에 있다. 부부가 지내는 방은 순이에게 공포 그 자체가 된다. 

한편 황주사는 장포수(민지환)에게 사람[만보]을 사냥해달라고 의뢰한다. 포수는 순이와 만보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본다. 하루는 순이가 만보의 새참을 챙겨주고 오는 길에 총소리에 놀라 넘어지면서 그릇들이 다 깨진다. 기분 나쁜 포수를 피해 급히 자리를 뜨던 순이는 신발을 한 짝 흘린다. 박살난 그릇 때문에 화가 잔뜩 난 시어머니는 포수가 신발을 던져 놓고 가자 순이가 그와 어울렸다고 오해하고는 모질게 회초리질을 한다. 순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몰래 집을 나간다. 하지만 만보에게 금방 다시 잡혀 온다. 시어머니는 순이를 방에 가두고 며칠간 밥을 굶겼다가 살살 달랜다. 순이는 방에 얼른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만보를 보고 다시 집을 뛰쳐 나간다.




굶주린 상태로 눈 덮인 산을 헤매고 다니니 순이의 꼴이 말이 아니다. 쓰러진 순이 앞에 포수가 나타나 먹을 것을 던져준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순이에게 포수는 더 잘 살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꼬드긴다. 하지만 순이가 말을 듣지 않자 강제로 끌고 간다. 그런 두 사람 앞에 만보가 나타나고, 포수는 그에게 총을 겨눈다. 두 남자가 대치하는 상황에서 순이가 포수의 다리를 물어 뜯는데, 순간 총이 발사되고 만보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포수는 도망가고 순이는 죽어가는 만보를 보며 오열한다. 이러려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이게 다 그 방 때문이라고. 순이의 얼굴 위로 활활 불타는 방이 겹쳐지면서 드라마는 끝이 난다. [*UHD 복원판에서는 화재 장면이 길게 나오고 순이와 만보의 대화가 추가되었다]

원작 소설과 드라마의 결말이 많이 다른 것 같아 다시 읽어보니, 각색을 해도 너무 심하게 해놓았다. 고리대금업자와 사냥꾼은 원작에 없다. 만보가 무자비하게 성욕을 풀어대는 '원수의 방'에 순이가 직접 불을 지르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인데, 어찌 이 부분을 (가상 인물까지 등장시켜) 바꿔 놓았는지 안타깝다. 만보의 존재가 사라진 뒤에 그 방을 태워 없앤다? 물론 화풀이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원작의 캐릭터가 훼손되어 버렸다.




자신이 왜 그런 처지가 되었는지 근본적인,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고 애먼 방을 탓하는 순이. 그 방이 없어져서 순이의 인생이 나아진다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없어지길 바라겠지만, 그게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순이가 더욱 더 불쌍할 뿐이다. 

🔥 🔥 🔥

이 '불' 또한 초반부터 고구마를 통째로 삼킨 듯한 속터짐을 선사한다. 혹독함이 느껴지는 겨울 풍경과 앳된 조민수 배우의 연기를 보는 맛이 있지만, 망가진 결말 때문에 자신있게 추천은 못하겠다. 대신 표현이 아주 리얼한 현진건의 원작 소설을 추천한다. 



2023-07-16

아네모네 마담 - KBS TV문학관 (정영숙 홍요섭 김보미)


밤 아홉시만 되면 아네모네 찻집에 나타나는 어느 대학생. 그는 늘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틀어 달라 신청하고는 마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가버린다.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마담과 대학생이 손을 맞잡고 있다
KBS TV문학관 아네모네 마담. 예고편 캡처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아네모네 마담"


: 제 205화. 1985.11.16 방영. 2023.07.16 재방영. 주요섭 원작, 박병우 극본. 이윤선 연출.
정영숙, 홍요섭, 김보미, 김진애, 김종결, 양재성, 김진태, 권성덕, 황범식, 반석진, 김기복, 이원발, 강양례, 홍순석, 유영희, 고아라 출연.





아네모네 다방을 운영하는 영숙(정영숙)은 매일 같은 시간에 나타나는 대학생(홍요섭)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그는 영숙을 뜨거운 눈길로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마담은 점점 그 이름 모를 대학생에게 마음이 기운다. 그가 고백해오기 만을 기다리며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친다. 영업이 끝나고 텅 빈 다방에서 그가 늘 앉는 자리를 맴돌며 사랑을 고백하기도 한다. 

옷에 신경을 쓰고 평소에 안 하던 귀걸이까지 하는 영숙을 보며 너도나도 한마디씩 한다. 영숙은 그에게 귀걸이로 멋을 낸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대학생은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발길을 뚝 끊는다.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영숙은 그저 속이 탈 뿐이다. 

그렇게 답답하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그 대학생이 돌연 낮에 찾아온다. 영숙은 그를 위해 미완성 교향곡을 틀어준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큰소리를 내더니 전축에서 레코드 판을 꺼내 사정 없이 부숴버린다. 일행인 친구(김기복)가 그를 다급히 데리고 나간다. 

그날 저녁, 대학생의 친구가 찾아와 자초지종을 말해준다. 사실을 알게 된 영숙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짧지만 달콤했던 꿈에서 깨어난다.




반전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자세히 쓰지 않았다. 이왕이면 드라마를 직접 보시길 바란다. 마담이 대학생을 예술가로 상상하는 장면이 유독 재미있다. 주 줄거리 외에 다방 단골 예술가들의 얘기도 쏠쏠한 재미를 준다. 무용가(김진애), 시인(김진태), 화가(김종결), 소설가(양재성), 영화감독(권성덕), 배우...... 일제 강점기 시대의 인물이 실명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대사도 시적인 표현이 많다. 여러모로 추천!

아네모네의 꽃말이 여러가지인데 '괴로운 사랑',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눈에 띈다. 영숙의 대사 중에 '우리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깊고 넓은 바다가 있어요' 이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마담이 대학생을 슬며시 바라보고 있다
KBS TV문학관 아네모네 마담. 마담 역의 정영숙




눈길 - KBS TV문학관 (안영주 민욱 염복순)


서울에서 바쁘게 살고 있는 경수(민욱)는 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오랜만에 시골에 내려간다. 1년에 한번 갈까 말까 한 그곳엔 어머니(안영주)가 있었다.


어머니가 아들을 눈으로 배웅하고 있다
KBS TV문학관 눈길. 웨이브 캡처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눈길"


: 제 115화. 1984.01.07 방영. 2023.07.03 재방영. 이청준 원작. 이은교 극본. 김재현 연출. 안영주, 민욱, 염복순, 남윤정, 신수강, 김인문, 반문섭, 이한승, 김상낙, 박현정, 안광진, 박상만, 전영미, 아역 권오현, 이종민, 박헌성 출연.


경수의 어머니는 아들과 둘째 며느리(염복순), 손자(이종민)를 몹시 반긴다. 경수는 어머니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목소리를 높인다. 이[치아]를 치료하라고 보낸 돈을 어머니가 생활비로 썼다고 하는 것이다. 경수는 생활비를 따로 챙겨드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큰 돈을 어디에 썼는지 아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제사 준비로 바쁜 집에 이장(김인문)이 찾아와 집 수리에 동참하라고 채근한다. 어머니는 아들이 들을 새라 그의 말을 끊는다. 솔직히 이 집에서 목돈이 나올 구멍은 경수 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들에게 부담이 되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부터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큰 아들 용수(반문섭)가 도박에 미쳐 전 재산을 날린 탓이었다. 부인(남윤정)이 사경을 헤맬 때도 그는 도박판에 있었다. 화가 날 대로 난 어머니는 아들이 대문을 부술 듯 두들겨도 열어주지 않았다. 용수는 동네 움막 같은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경수는 동네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 어머니가 어디에 돈을 썼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술에 잔뜩 취해서는, 자신을 마중 나온 어머니에게 반복해서 얘기한다. "나는 어머니에게 빚진 거 없다"고. 어머니는 길을 되짚어 가며 아들이 흘린 신발을 찾아온다. 이를 본 경수의 부인은 어머니에게 냉정한 남편이 야속할 뿐이다.

사실 어머니는 아들이 준 돈으로 자신이 묻힐 땅[집터]과 수의, 꽃상여를 마련해 놓았다. 손자들은 언제 새집을 짓느냐고 묻는다. 어머니는 2층으로 집을 짓고 마당에는 잔디도 입힐 거라고 답해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환호하고 어머니는 혼자만 아는 웃음을 짓는다. 경수의 부인은 시어머니가 과거 얘기를 꺼내도록 자꾸 묻는다. 

어머니와 아들이 눈길을 걸어가고 있다
KBS TV문학관 눈길. 웨이브 캡처

다른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경수(권오현)가 급히 집에 온다. 텅 빈 방에는 경대 하나만 남아있다. 밤에 눈이 펑펑 내리고 어머니는 아들의 신발에 쌓인 눈을 턴다. 다음날,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던 어머니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버스 정류장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눈밭에 남아있는 두 사람의 발자국을 친구 삼아 돌아간다.

이때 집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하지만 새 주인에게 부탁해서 하룻밤 아들과 지낸 것이다. 경수도 집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고 달려온 것일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어머니는 담담히 회상한다. 다른 방에서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있던 경수는 눈물을 흘린다. 그간 형 대신 가장 노릇하며 어머니에게 냉정했던 자신에 대한 참회였다. 


* 줄거리를 써 놓고 보니 어찌 보면 평범하다. 소설에서는 아들이 어머니를 '노인'으로 지칭한다고 하니 감정의 골이 더 크게 그려지는 모양이다. 자식이라면 부모를 돌보는 게 도리이긴 하지만, 혼자 힘으로 출세해 오랜 세월 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식이라면 그 고단함과 고충에서 비롯되었을,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이해가 간다. 티브이 문학관 '눈길'은 아들이 어머니의 사랑을 새삼 느끼고 우는 것까지만 보여준다. '어머니 제가 앞으로는 자주 자주 뵈러 올 게요 부디 건강하세요' 따위의 대사는 이어지지 않는다. 절제 되고 깔끔한 연출이 돋보인다. 추천! 


2023-07-14

소리의 빛 - KBS TV문학관 (전무송 김성녀 김성겸)


예고를 보자마자 기시감에 시달렸다. 이거 아는 내용인데? 영화 서편제? 아니나 다를까, 같은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었으니 내용이 거의 같을 수밖에.


TV문학관 소리의 빛. 전무송, 김성녀. 유튜브 캡처


UHD로 만나는 티브이문학관 '소리의 빛'


: 제100회. 1983.09.17 방영. 2023.06.26 재방영. 원작 이청준 연작소설 '남도소리'중 2편. 이희우 극본. 김홍종 연출. 전무송, 김성녀, 김성원, 김성겸, 조용원, 여운계, 이일웅, 아역 최호창, 김민희 등 출연.

=== 줄거리 나옵니다. 스포 주의하세요 ===

교도소에서 나온 한 사내(전무송). 선학동이라는 동네를 찾아가서 하룻밤 묵기를 청한다. 사내는 옛 생각에 젖는다.

사내(최호창)의 엄마는 아기를 낳고 죽었다. 아기의 아빠는 사내의 친아빠가 아니고 떠돌던 소리꾼(김성겸)이었다. 소리꾼은 사내의 집과 재산도 다 팔아버리고 엄마까지 죽게 만든 원수였다. 하지만 사내는 그런 죽일 놈을 아버지로 여기며 살아가야 했다. 소리꾼은 사내가 목청이 좋다며 무조건 소리를 배워야 한다고 강요했다. '소리가 하늘에 닿으면 소리 속에서 학이 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학을 못 보았으니 네가 대신 봐야 한다'.


사내는 소리꾼이 자는 동안 그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엄마에 대한 복수심에 활활 불타오르다가도 소리꾼의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흔들렸다. 사내는 복수 대신 의붓아비와 배다른 여동생(김민희)에게서 도망쳤다.  

세월이 흐르고 사내는 전국을 돌며 부녀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듣게 된 소식은 거렁뱅이가 된 두 사람을 판소리 애호가 최부잣집에서 받아주었는데, 자신이 병든 것을 알게 된 소리꾼이 폐 끼치는 게 싫어서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그때 여동생(조용원)은 이미 맹인이 된 상태였다.

사내는 주막의 남자 주인(김성원)에게 여자 소리꾼[여동생]에 대해 묻지만 주인은 모른다고 시치미를 뗀다. 그러자 사내는 여동생이 어떻게 맹인이 되었는지 말해준다. 소리꾼은 청강수[독약]를 얻어다가 자고 있는 딸의 눈에 떨어뜨렸다. 가슴에 한을 심어준다는 명목으로. 하지만 사내가 보기엔 딸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것일 뿐. 이 얘기를 들은 주인은 분개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다.  


또 세월이 흐르고 사내는 결국 맹인 여자 소리꾼(김성녀)을 만나게 되었다. 여자 소리꾼은 실어증 걸린 것처럼 목청을 닫아버린 상태였는데 사내에게는 거짓말처럼 소리를 들려준다. 사내는 여자에게 어릴 적 얘기만 꺼내고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사내가 간 뒤 여자는 다른 사람(이일웅)에게 말한다. 오래비가 다녀갔다고. 아는 체를 하지 않은 건 오래비 눈에 살기가 도는 것을 보아서라고 한다. 아비와 자신을 하나로 느껴서 이번에도 (살인 하기 전에) 도망가버린 것이라고. 사내는 담 뒤에서 여자의 얘기를 다 엿듣고는 그대로 떠나버린다.

급기야 사내는 주막 주인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며 위협한다. 그제야 주인은 얘기를 들려준다. 여자 소리꾼이 아비의 유골을 갖고 찾아왔었다고. 동네 어딘가에 몰래 묻고는 사라졌는데 그때부터 동네에 다시 학이 날아다닌다고. 얘기를 안 했던 건 여자 소리꾼이 신신당부를 해서였다고 한다. 누군가 자신을 찾으면, 자신에 대한 얘기를 먼저 하기 전에는 절대로 얘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 주인에게서 얘기를 다 들은 사내는 정처 없이 발길을 옮긴다.......

TV문학관 소리의 빛. 김성겸, 조용원. 유튜브 캡처


이유야 어찌 됐든 아비가 딸의 눈을 멀게 만드는 부분은 소름이 돋다 못해 화가 뻗친다. 소설에서는 눈의 기운을 목으로 가게 해서 목소리를 좋게 만들려고 했다는 설명도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대체 그놈의 소리가 뭐라고. 사내가 어렸을 때부터 소리꾼에게 살의를 품은 게 너무나 이해가 간다. 더구나 여동생까지 장애인으로 만든 것을 알게 되었다면, 아무리 애증의 관계라고 해도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까지 더해질 것 같다.

복수하고 싶은 대상은 사라지고 만나고 싶은 대상도 사라지고 나이만 먹어버린 주인공의 인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오랜 세월에 걸쳐 켜켜이 쌓인 복잡다단한 감정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다 보고나니 고구마 백개는 삼킨 것 같지만 깊은 울림과 먹먹함을 주는 작품이다. 추천.
 


* 소리꾼으로 나온 김성겸 배우 하면 '하늘아 하늘아'에서 괴팍한 영조로 나왔던 게 잊혀지지 않는다. 사도세자로 나왔던 정보석이 어찌나 불쌍했던지. 혜경궁 홍씨 하희라도 그렇고. 여기서도 정말 욕 나오는 역으로...... (역사의 평가와는 별개로 드라마 속에서 그랬다는 것이다)


* 영화 서편제는 우리나라 영화 역사상 최초로 일백만명 넘는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다. 아직 안 보신 분은 티브이문학관과 비교해서 보는 것도 좋겠다.

* '소리의 빛'이 조용원 배우의 TV 데뷔작이라고 한다. 오랜만에 보니 너무 반갑다.

TV문학관 소리의 빛. 조용원. 유튜브 캡처

백치 아다다 - KBS TV문학관 (김일란 김인문 장학수)


선천적으로 지능이 낮고 언어 장애를 가진 주인공 아다다(김일란). '확실'이라는 이름이 있는데도 아다다로 통한다. 무려 양반 신분인 김초시(이일웅)의 딸이지만 타고난 모자람 때문에 애들한테 놀림을 당하고 집에서도 구박받는다. 이 집에는 수롱(김인문)이라는 머슴이 있었는데 아다다와 서로 마음이 있는 사이였다.


아다다가 헛간에 숨어 울상을 짓고 있다
TV문학관 '백치 아다다'


UHD로 만나는 TV문학관 아홉 번째 작품 "백치 아다다"


: 1983.06.11 방영. 2023.05.01 재방영. 계용묵 원작. 유열 극본. 주일청 연출. 김일란, 김인문, 장학수, 김난영, 이일웅, 여운계, 이치우, 남윤정, 곽정희, 전원주, 박용식, 이대로, 홍영자 등 출연.

=== 줄거리 나옵니다 스포 주의 ===

수롱은 혼자서 몇 사람 몫을 해내는 뛰어난 일꾼이긴 했지만, 김초시의 입장에선 딸의 짝으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아다다를 며느리 삼으려 하는 집은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수롱과 맺어주려 하는데 일이 터진다. 만석(장학수)이라는 놈이 아다다를 좋아한다면서 강간을 해버린 것이다.  

만석의 아비(이치우)는 쫓겨날 것을 각오하고 김초시 집에 사과를 하러 온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이 집과 혼담이 오간다. 김초시는 천애고아 수롱보다는 부모라도 있는 만석을 사위 삼기로 결정한 것이다. 땅과 함께 시집간 아다다는 남편과 시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산다. 하지만 만석이 김초시로부터 받은 땅을 구리 광산에 투자하고 이게 대박이 나면서 아다다의 행복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돈맛을 알아버린 만석은 아다다를 천대하고 자꾸 친정에 가게 한다. 하지만 아다다의 부모는 죽어도 시댁에서 죽으라며 아다다를 내치기 일쑤다. 아다다는 시댁에서 유령처럼 숨어 살고 만석은 급기야 여자(남윤정)를 집에 데려온다. 친정에 있는 줄 알았던 아다다가 집에 있는 것을 본 만석은 죽일 듯이 아다다를 협박해서는 완전히 내쫓아버린다.

딸을 걱정하면서도 못 참아하던 아다다의 모친(김난영)은 아다다가 된장 항아리를 깨뜨리자 그간 쌓였던 분노가 터지면서 그녀를 마구 때린다. 집에서 도망쳐 나온 아다다는 차마 죽지 못하고 어느 집을 찾아간다. 거기엔 수롱이 혼자 살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동네를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 여전히 아다다를 아끼는 수롱은 그녀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며 평생 모은 돈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다다는 돈이 생기자 무섭게 변해버린 만석이 떠오를 뿐이었다. 수롱이 고깃배를 사서 부자가 되면 만석처럼 되어버릴까봐 공포에 사로잡힌다. 전전긍긍하던 아다다는 수롱의 돈에 불을 지르고는 집을 뛰쳐나간다.
 
수롱이 집에 돌아왔을 땐 그의 전재산은 이미 재가 된 뒤였다. 그야말로 돌아버린 수롱은 아다다를 찾아서 그녀를 물속에 마구 처박는다. 대체 왜 그랬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아다다는 영원히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망연자실한 수롱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바다를 향해 몸을 날린다. 아다다를 목놓아 부르면서. 
 

 
다 아는 내용이지만 다시 보고 나니 속이 터지다 못해 울분이 치솟는다. 핵고구마를 넘어서 핵폭탄 수준이다. 아다다가 원해서 장애를 가진 것도 아닌데 어떤 경우든 버팀목이 돼주어야 할 부모조차 딸을 외면하고, 결국은 아다다가 좋아했고 아다다를 진심으로 좋아한 수롱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게 너무나 비극적이다. 정작 중요한 것을 놔두고 허울과 명분을 좇은 결과가 어떤 비극을 가져오는지 이 작품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매를 맞은 아다다가 집에서 나와 절벽 앞에 섰다가 차마 뛰어내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혼자 돌아다니는 장면이 있는데, 그 어떤 장면보다도 슬프게 느껴진다. 숱한 드라마에서 조연 내지 단역으로만 보았던 김일란 배우의 연기는 정말 끝내준다. 👍👍👍

영화 백치 아다다에서 주연을 맡은 신혜수 배우
영화 '아다다' 포스터. 다음 이미지

* 영화 '아다다'에서 신혜수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다음에서 이 영화를 검색하면 오른쪽 포스터가 나오는데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 무슨 19금 성인영화처럼 만들어 놓았다. 

* 1970년대에 MBC에서 일일 드라마로 만들었었다고 한다. 정영숙, 백일섭 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