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06

말하는 눈 - MBC 베스트셀러극장 (정혜선 이기선)

위키백과의 베스트셀러극장 작품 목록을 정독했다. 그중 눈에 띄는 제목이 있었으니 '말하는 눈'. 출연자 명단에 배우 정혜선님도 들어있으니 틀림없다. 유레카!

 
정혜선이 어딘가를 올려다 보며 웃고 있다
배우 정혜선. 출처 여성동아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68회 '말하는 눈'

: 1985. 4. 21 방영. 박철수 연출. 정혜선, 이기선, 박영규, 김추련 출연. 

눈꺼풀을 빼고는 전신 마비 상태인 정혜선(극 중 이름을 모르는 관계로 배우 성함 사용. 존칭 생략). 어떻게 그런 상태가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서 지내는데 며느리(?)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그러다 웬 남자(김추련 아니면 박영규)가 등장하는데 그를 향해 미친 듯이 눈을 깜박인다. 남자는 그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대화를 시도한다. '예'는 한 번, '아니오'는 두 번 눈을 깜빡이라 정하고 글자판을 만들어 자음과 모음을 하나하나 짚는다. 정혜선이 말하고 싶은 단어는 냉장고 냉동실에 숨겨져 있는 그것, 가스마스크.

며느리로 나왔던 배우가 어찌나 표독스러운지 정말 무서웠다. 배우가 누구인지 알쏭달쏭했는데 출연진 중에 '이기선' 이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어느 날 혜성 같이 나타나 MBC 드라마에 연이어 나왔던 배우. 어릴 적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시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안 보여서 정말 섭섭했었는데... 악마로 기억하는 캐릭터가 이 분이 연기한 것이었다니.

이기선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배우 이기선. 출처 다음이미지

정혜선이 필사적으로 눈을 깜박이는 장면과 물이 가득한 욕조에 얼굴까지 잠기는 장면이 기억 속에 진하게 남아있다. 이기선이 방독면을 얼굴에 쓰고 집안에 가스를 틀었던 것 같은데 정작 결말이 어떻게 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정혜선을 도와주려고 했던 남자도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안 나고. 아, 궁금해.

원작자가 '마이클 해리슨'이라는 정보로 1990년대에 사망한 작가를 찾아내긴 했으나 대표작 중에 '말하는 눈'과 비슷해 보이는 제목이 없었다. 혹시나 영상이 유튜브에 있을까 기대를 해보았지만 없다.......

어렸을 때 정말 숨죽이며 봤었는데, 진심으로 다시 보고 싶다.



월광 - MBC 베스트셀러극장 (김인문 김해숙 심양홍)

이 단막극을 기억하는 건 살구색이 난무하는(?) 장면 때문이다. 달빛만이 살아있는 밤을 틈타 동네 외진 곳에서 만나는 두 남녀. 옷을 벗어던지고 살을 비비는데 그 장면이 당시엔 그렇게 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내용은 다 까먹고 오로지 이 장면만 머릿속에 남아있었으나 배우들이 누군지 알고 있어서 제목을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왼쪽부터 고 김인문, 김해숙, 심양홍
왼쪽부터 고 김인문, 김해숙, 심양홍. 출처 티비리포트/오마이뉴스/SBS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 118회 '월광'


: 1986. 6. 15 방영. 오유권 원작. 고 김인문, 김해숙, 심양홍, 박은수 출연.

원작은 오유권 작가의 소설 '월광'. 이 작가분은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데 우리말 큰사전을 세번씩이나 필사하면서 혼자 공부하셨다고 한다. 남긴 작품이 수백 편이고 그중 1백 여 편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 쓰신 거라고 한다. 우리나라 소설을 꽤나 읽었다고 자부하지만 솔직히 낯선 이름이다. 유튜브에 낭독판이 있어서 들어보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나 김유정의 '봄봄'이 생각날 만큼 토속적이다. 어찌 이런 작가를 모르고 살았을까?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 스포일러 주의! -



줄거리는 이렇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그리고 두 아이가 한 집 한 방에서 같이 산다. 아들이자 남편은 좌익 사람들을 고발하는 일을 하다가 산속으로 도망친 건지 잡혀간 건지 죽은 건지 소식이 없다. 매일 밤 며느리가 소변보러 나갈 때마다 그 소리에 깨서는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르던 진 노인은 어느 날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며느리를 따라나선다.

불길한 예감은 잘 들어맞는다고 며느리는 동네의 사내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으슥한 보리밭에서 뼈와 살이 타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는 사내를 진 노인은 불러 세운다. 놀랍게도 주먹을 날리는 대신 며느리에게 다시 가보라고 하는데...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한 진 노인은 며느리가 새로운 짝을 만나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하필 그때 어둠 저편에서 나타난 사람은 바로바로바로 아들...! 허허, 이 죽일 놈의 타이밍 어쩌란 말인가.


* 유튜브에 찾아보니 KBS에서 만든 단막극이 올려져 있다. 변희봉, 권재희 주연. 재미있어 보인다. (2023.09.18 변희봉 배우 타계)

* 이 단막극에서 심양홍 배우를 처음 봤는데 너무나 동네 아저씨 느낌이라 배우가 아닌 줄 알았다; 이후로 일요 아침 드라마 '한지붕 세 가족'에 등장. 찾아보니 국문학 전공이신데 왜 전직이 음대 교수였다는 헛소문이 났던 걸까?

* 비록 머릿속에 남은 것은 19금 장면 뿐이었지만 그 덕분에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알게 되었다. 사전 필사 얘기를 들으니 고 김소진 작가가 떠오른다. 이 분도 사전을 통째로 옮겨 적었다고 한다. 순수문학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소설들을 썼었는데 안타깝게도 병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2023-10-05

인형의 교실 - MBC 베스트셀러극장 (김혜수)

지금은 누구나 알아주는 배우가 된 김혜수. 고등학생 때 데뷔했지만 너무나 성숙한 외모를 가졌기에 주로(거의) 성인 역할을 했다. '인형의 교실'에서 선생님으로 나왔을 때가 우리나라 나이로 17살. 도무지 제 나이로 보이지 않는 외모에 감탄하며 이 단막극을 보았었다.

김혜수가 꽃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인형의 교실'에서 선생님으로 나온 김혜수. 유튜브 캡쳐

MBC 베스트셀러극장 제133회 인형의 교실


: 1986. 10. 19 방영. 오탁번 원작. 장선우 연출. 김혜수 주연.

외진 곳의 초등학교에 새로운 선생님이 온다. 그런데 선생님의 물건이 자꾸 없어진다. 아이들도 어딘지 모르게 이상하다.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극 전반에 흐른다. 선생님의 물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알고 보니 선생님이 갑자기 떠날까봐 아이들이 숨겨놓은 것. 물건을 찾느라 선생님이 떠나는 게 지체될 수도 있고, 남은 물건은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으니.......

긴 생머리에 하얀 블라우스 였나 흰색 윗옷을 입은 김혜수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다. 새가 지저귀듯 가늘고 톤이 높은 목소리도 참 상큼했었는데. (훗날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혹시 유튜브에 있나 하고 찾아봤더니 있다! 화질은 안습이지만 볼 수 있는 게 어디여~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보실 분은 있을 때 보세요)

MBC도 KBS처럼 베스트셀러극장 고화질로 복원해서 특집으로 방영해주면 어떨지?



2023-10-02

매직 - 2004년 SBS 주말드라마 (강동원 김효진 엄지원 양진우)

영화배우 강동원도 드라마에 나온 적이 있었다. MBC에서 두 편(위풍당당 그녀, 1%의 어떤 것), SBS에서 한 편. 이 세 작품을 끝으로 그는 스크린에서만 볼 수 있는 배우가 되었다. 가끔씩 생각나는 그의 드라마 '매직'. 주인공 차강재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20대 리즈 시절의 강동원
SBS 드라마 매직. 출처 공식홈


매직 (SBS)

: 2004.08.28 ~ 2004.10.17 토,일 방영. 윤성희 극본. 고경희, 홍창욱 연출. 강동원, 김효진, 양진우, 엄지원, 서인석, 강남길, 이응경, 정동환, 이인, 윤용현, 이찬, 이대연, 정소영, 정선우, 김영숙, 임주환 출연. 마술사 최현우 특별 출연.


그러고 보니 이 드라마가 '파리의 연인' 후속작!

'파리의 연인'이라면 엄청난 시청률을 올리며 2004년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궜던 로맨스 드라마였다. 카리스마 넘치는 박신양과 너무나 사랑스러운 김정은, 정신 못 차리게 재미있는 스토리가 시청자의 혼을 쏙 빼놓았었다. 그런 인기작의 뒤를 이어야 했으니 '매직' 제작진은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그래서 라이징 스타 강동원을 회심의 카드로 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그에게 더 큰 인기를 안겨준) 영화 '늑대의 유혹'이 개봉하고 한 달 뒤쯤부터 방영했으니 그 반사이익도 기대했을 것이다. But !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쓴웃음이 나온다. 1회 시청률 20%, 마지막회 시청률 14%. 잘 나가던 그에게 상처를 안겨준 어쩌고 저쩌고... 그리고 강동원이 그렇게 연기를 못했었나? 글쎄. 감명 깊게 본 드라마가 이런 혹평을 받았던 걸 십수 년 만에 되새기니 마음이 좀 아린다.

======= 스포일러 주의하세요 =======


'매직'에 많은 인물이 나오지만 유독 생각나는 건 마술사와 그의 아들, 차강재 세 사람의 얘기다. 마술사는 아들에게 기술을 물려주려 하지만 차강재가 더 재능을 보인다. 없느니만 못한 아버지를 뒀던 차강재는 자신을 대가 없이 받아준 마술사를 친아버지처럼 여기고, 마술사 역시 차강재를 아들처럼 챙겨준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친아들을 찾는 마술사를 보고 차강재는 더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상처 많은 내면아이를 가진 차강재와 강동원의 차가운 이미지가 내 눈에는 잘 어울려 보였다. 십수 년 간 그의 다른 작품들을 본 눈으로 이 드라마를 다시 보게 되면 감상이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김효진도 순수한 캐릭터를 잘 연기했다. 차강재가 마지노선을 넘으려 할 때 한 조각 남은 양심처럼 그를 멈칫하게 만드는 캐릭터랄까.

마지막회의 마지막 대사가 너무 멋있어서 적어놓고 음미했었는데 이제는 기억이 안 나서 그 부분만 다시 보고 받아 적었다. "내게 있어 세상은 마실 수록 갈증 나는 바닷물 같았다. 너의 사랑을 다 마셔버린 나는 이제 더 이상 목이 마르지 않다". 파도치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절벽 앞에 서있던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앞으로 갔을까, 뒤로 갔을까.



옛 사랑의 그림자 - 1998년 SBS 드라마스페셜 (방은희 김주승 옥소리)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는 말이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그 비슷한 경우다. 여자(방은희)는 남자(김주승)에게 철저히 배신당하고 악만 남았다. 남자는 새로운 사람과 이미 가정을 꾸렸다. 여자는 남자의 옆집으로 이사를 가서 남자의 부인(옥소리)과 아주 친해진다. 그리고 자신을 배신한 남자의 얘기를 털어놓는다. 그 남자가 바로 자기 남편이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부인은 남편에게 여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기가 막혀한다.

두 여자와 아이가 놀이공원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왼쪽부터 방은희, 김지선, 옥소리. 출처 아역배우 김지선 카페


옛사랑의 그림자 (SBS)

: 1998. 2. 19 ~ 3. 19 방영. 김도우 극본. 김한영 연출. 방은희, 김주승, 옥소리 출연.


이런 얘기라면 여자가 모든 것을 폭로하고 남자의 가정을 깨뜨리는 것으로 복수하는 결말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드라마는 그쪽으로 가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를 박살 내려고 보니 그 부인이 너무 착한 것이다. 이런 개스키가 어디서 그런 천사를 만났는지 의문스럽지만 여하튼 설정이 그렇다. 복수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여자를 친자매처럼 잘 대해주는 부인이 암초가 된다. 여자는 남자한테 상처를 되돌려 주고 싶지만 그 부인에게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양가감정에 시달린다. 결국 여자가 선택한 것은.......


사실 본 지 오래되어 그 부인이 진실을 알았는지 아닌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여자가 그 부인의 행복한 모습을 상상하며 죽음을 맞이하는(선택하는) 암시로 끝났기에 모든 것을 묻고 간 듯하다. 물 없이 밤고구마 천 개는 먹은 듯했던 결말. 복수를 완성하기엔 끝내 독하지 못했던 비련의 여자 역을 방은희 배우가 빙의라도 한 것처럼 기가 막히게 보여줬다. 너무나 바보 같았지만 결코 욕할 수 없는 여자. 그래서 잊을 수 없는 여자.

* SBS 홈페이지에도 인기 드라마 아닌 이상 정보가 없다. 떼잉~

* SBS 개국하고 얼마 안 되어 방영한 줄 알았더니 아니구나. sbs가 문을 연 것은 1991년 말인데, 난 왜 이렇게 기억하고 있을까??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제목의 베스트셀러극장은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다.